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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 story/뷰티 앤 패션 노하우

[beauty people]결코 우아하지 못했던 그레이스 켈리의 우울한 사생활

by roo9 2020. 12. 11.

 

그레이스 켈리는 1929 11 12 아버지 . H.켈리의 3번째 아이로 태어났다그녀의 유년 시절은 필라델피아에서 보냈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올림픽 컬링 종목 금메달리스트이며 선수 생활  은퇴   벽돌 사업으로 매우 성공하여 부유하게 성장하였다.

 

그레이스 켈리의 성장기

 

 

그레이스 켈리는 유복한 환경에 비하여 부모의 사랑은 부족했던 것만큼은 분명한 것같다. 일단 그의 아버지는 출세와 명예욕에 골프와 정치에 몰입했고, 이는 가정의 부재를 의미한다.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기대감도 높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건 켈리의 언니였다고. 남편의 부재로 아내는 자식들에게 화풀이 비슷한 걸 했던 모양이다. 혹독한 매질을 일삼았다고.

 

비교적 못생긴 그레이스 켈리 유년 시절

 

 

특히 그레이스 켈리는 어린 시절 과체중에 안경을 끼고 축농증에 시달렸으니 예쁜 구석도 없었나 봄. 그런데도 그녀는 삼촌들이 극작가와 배우를 하고 있어서 그들처럼 비슷한 일을 꿈꾸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 필라델피아의 사립 명문 스티븐슨 학교에 다녔는데 학교 연극에 출연하며 자신감이 붙었고 남학생들도 점점 예뻐진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 켈리는 점차 외모도 뛰어났지만 성격이 좋았던지 남자 친구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거칠고 털털하다고 보기도 했겠지만

내숭 떠는 다른 여학생들과는 달리 매력적이어서 학교에서 이미 스타였다. 그렇다고 주말에 데이트하거나 춤에 빠져 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레이스 켈리는 학창 시절 수학을 너무 못해서 가고자 했던 버몬트의 주의 베닝턴 여대에서 입학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연기랑 수학이 뭔 상관. 암튼 성적 미달로 차선인 뉴욕 명문 학교 AADA(American Academy of Dramatic Arts)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빼어난 연기자가 되기보다는 좋은 남자를 만나는 방향으로 성장할 거로 예상했다. 부모의 촉이 좋았네.

 

유부남 강사와 눈이 맞은 그레이스 켈리

 

 

 

대학에 들어간 2학 년때 그레이스 켈리는 유부남 강사 돈 리처드슨과 부적절한 연애를 한다. 그레이스 켈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필라델피아에 있는 가족에게 선보였는데 리처드슨이 유대인이었는지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반유대주의임을 밝혔고, 그러거나 말거나 리처드슨은 그레이스 켈리가 언젠가  영화계 거목이 될 거라 말하자 가족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이스 켈리의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언니 마거릿 켈리는 리처드슨의 여행 가방을 뒤져 부인에게 이혼을 알리는 편지를 발견하고 그에게 떠나라고 말했고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둘이 은밀히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안 그녀의 아버지는 그에게 모종의 딜을 제안하고 끝냈다고. 그게 돈인지 자동차인지 확실치는 않음.

 

아름답게 성장하지만 사생활은 우아하지 못했던 그녀

 

 

본격적인 영화 출연 전에 그레이스 켈리는 텔레비전 드라마 등에서 소소한 배역을 많이 맡았고 그런 와중에 숱한 동료 배우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등 우아하지 못한 행동을 일삼았다. 외모가 점점 물이 오른 그레이스 켈리는 20살의 나이에 연기를 처음 시작하여 21세 때인 1951년 ’14시간’이라는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한다. 다음 해는 영화 ‘하이 눈’으로 톱스타가 되었다.

 

1953년에는 영화 ‘모감보’를 찍으면서 클라크 게이블과 사랑에 빠졌고 또한 ‘다이얼 엠 포 머더’의 레이 밀랜드와도 데이트를 했다. ‘더 컨츄리 걸’의 빙 크로스비는 그레이스 켈리에게 프로포즈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크로스비가 가톨릭 신자에 홀아비여서 결혼을 허락했지만 정작 그레이스 켈리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불과 25세의 나이에 ‘회상 속의 연인’으로 제2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최고의 스타가 된 후 모나코 여왕이 되다

 

 

그리고 그레이스 켈리는 26살에 연예계 은퇴를 하고 모나코 여왕이 된다. 어떤 날, 뭔가 운명에 끌렸던지 누군가의 계획이었던지 심신이 지친 탓이었는지 그레이스 켈리는 여행차 모나코를 방문하여 모나코의 레니에 왕자를 처음으로 만난다. 왕자는 그레이스 켈리의 기품있고 우아한 모습에 반했다. 한편, 그레이스 켈리는 레니에 왕자의 매너 있고 편하게 대해주는 모습에 호감을 느꼈지만 그들의 만남은 매우 짧았고 그래서 아쉽게 헤어졌다. 그러던 중 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레니에 왕자는 그곳에서 그레이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  겨울 레니에는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필라델피아에 있는 그녀의 가족을 보길 원했고 그녀는 고심 끝에 허락했고 이틀 동안 그와 필라델피아에 머물며 숲을 걷고 산을 운전하고 서로의 삶과 가치관에 이야기하면서 온전히 그들만의 사적인 만남으로 사랑에 빠졌다.

 

최고의 프로포즈 세기의 결혼식 불행한 결혼 생활

 

 

레니에의 구애에 그레이스 켈리는 일과 사랑 사이에 잠시 갈등한다. 1956년 ‘상류 사회’라는 영화에서 레니에 왕자가 선물한 12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착용하고 나오며 청혼을 간접적으로 승낙하였고 이후 그레이스 켈리는 은퇴하고 결혼으로 골인한다. 그레이스 켈리는 그때의 결심을 이렇게 말했다. 여러 번의 불행한 로맨스를 겪고, 비록 스타가 되었지만 나는 길을 잃고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 30대를 홀로 표류하고 싶지 않았다고...

 

 

 그리고 둘은 모든 여성이 부러워 할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자유로운 생활에 익숙한 그레이스 켈리는 처음에는 엄격하고 절도 있는 왕실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런데다 불화설도 퍼지고 우울증 증세도 보였다. 그런 와중에 캐롤라인, 알버트, 스테파니 세 아이를 낳았다.

 

켈리 덕분에 경제 위기를 모면한 모나코 그리고 불행한 사고

 

모나코의 경제적 위기도 그레이스 켈리 덕에 모면하였다. 결혼 후 관광 수입이 늘었고 프랑스와의 합병 위기를 넘기는 등 그레이스 켈리로 인해 작은 공국이던 모나코가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나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레이스 켈리는 비록 은막에서 은퇴는 하였지만 인기와 명성은 그대로 유지하였고 왕비의 역할도 훌륭히 잘 해냈다.

 

그러나 자식만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지 막내딸 스테파니 공주 때문에 꽤나 끓었다고 한다. 한동안 그레이스와 레니에 공은 스테파니를 꾸짖는 게 일상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가장 아끼던 자식이었다고. 그레이스 켈리는 1982년 9월 14일 52세의 나이로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운전중 뇌졸중을 일으켰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동차가 낭떠러지로 추락하면서 조수석에 앉았던 스테파니는 무사했다는데 뭔가 다이애나비 죽음과 오버랩 되면서 석연치 않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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