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에서도 샤넬은 콧대 높기로 유명한 브랜드. 화장품이 쇠퇴하면 패션이 흥하고 패션이 쇠하면 화장품이 흥하면서
완벽한 상부상조를 이루는 샤넬.
가난한 룩(poor look)의 창시자 샤넬
부와 자존심의 상징이기도 한 샤넬은 모든 면에서 멋진 비쥬얼을 갖추기는 했으나 실속은 없는 편이다. 태생 배경부터 페이크 재질이었고, 일종의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히트치긴 했으나 성분, 성능까지 뛰어난 건 아니다. 특히 샤넬 기초 화장품 쓰고 피부 좋아졌다는 사람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샤넬 화장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냥 브랜드 자체가 좋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입생로랑이나 그밖에 새롭게 활약하고 있는 명품 브랜드에게 다소 밀리고 있는 감이 없지 않지만… 샤넬 백만큼은 누구에게도 순위를 양보할 수 없다는 듯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 중.
샤넬의 라이프 스토리
이런 위대한 브랜드를 만든 샤넬의 창시자 가브리엘 샤넬의 라이프 스토리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샤넬은 1883년 8월 19일 프랑스의 소도시 루아르 강변이 보이는 소뮈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엄마는 샤넬이 12살 때 결핵을 사망하고 이후 샤넬은 가톨릭 수녀들이 있는 고아원에서 생활하게 된다. 아비란 작자는 자식들만 싸질러 놓고 마누라가 죽자 자식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방랑하다 사라졌다고. 못 먹고 못 자라서 미숙했지만 똑똑했던 샤넬은 훗날 부자들이 좋아할 소재로 활용하게 될 가난의 경험과 기억을 축적하며 성장한다.
생각해보건대, 영특했던 샤넬은 주변에서 일어난 일련의 모습들을 두리번거리며 눈빛을 반짝거리며 이렇게 말 했을 것 같다.
“나중에 써 먹어야지, 나중에 만들어야지, 나중에 팔아야지.”
가난한 배경 속에서 탄생한 샤넬 브랜드
현재 가장 럭셔리한 브랜드를 상징하는 샤넬은 그렇게 가난 속에서 탄생하였다. 샤넬은 poor look 그러니까 가난한 룩의 창시자였다.
가난 속에서도 샤넬의 눈썰미는 최상급이었다. 샤넬은 자신이 본 남성 스웨터, 선원용 트리코트, 정비공의 블라우스, 웨이트리스의 화이트 컬러 등을 착안해 심플하고 세련된 작품을 만들었다. 산업 시대를 맞이하여 대량 복제, 대량 생산에 최적화된 디자인과 재료 수급에 중점을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오늘날의 패스트 패션의 원조가 샤넬이라고 볼 수 있음에도 아이러니하게 현재 샤넬의 위치는 독보적이며 공고하다.
샤넬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럭셔리의 반대가 가난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럭셔리는 천박의 반대이다. 명언이다.
부모없이 홀로 생을 지탱해야 했던 샤넬은 남들보다 영악하고 치열한 생존 본능을 알고 있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그녀는 디자이너로서 드로잉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바느질 하는 것은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타고나길 센스있는 사업가며 안목있는 특출한 기획자였다.
부유한 남자들로부터 배운 상류 사회 매너
18세가 된 1901년 샤넬은 고아원에서 나와 자신보다 몇 살 많은 고모 아드리아네와 함께 살게 되었고 재봉사로 취직하게 된다. 샤넬은 우연한 기회로 패션계에 인맥이 있는 부류들과 어울렸고 샤넬은 미처 익히지 못한 상류 사회의 매너 등을 그녀와 어울린 부유한 남자들로부터 배웠다.
매너 있는 행동을 스스로 곁눈질하면서 익힌 것도 있었고, 사회 진출, 특히 상류 사회 진출하는 데 결격 사유 없을 교육을 받은 걸로 나오는데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이 디테일하게 가르쳐 줬을리가 없다. 분명 스폰서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을 거다. 아마 이런 부분이 훗날 음모론으로 작용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스파이 설 같은 거.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음.
샤넬은 성공한 신진 디자이너로 잘 나가고 있었고 그러한 그녀를 기회주의자라고 부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녀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1921년에 출시되어 불티나게 팔리던 샤넬 넘버 5 향수 제조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샤넬은 독일 장교와 사랑에 빠졌고 그래서 프랑스의 나치와 협력했으며 진짜로 스파이 활동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본의 아니게 정보를 주었을 수도 있지만 어릴 적부터 생존 본능이 강한 기회주의적 성향의 샤넬임을 강조한다.
독일 장교와 사랑에 빠지고 히틀러 정권에 협력한 샤넬
샤넬은 나치 정권이 영원할 줄 알았던 오류를 범하고 만다. 샤넬은 회사가 히틀러식으로 아리안 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녀의 사업에 도움을 준 유대인 사업 파트너를 밀고하거나 추방하려고 애썼다. 바로 샤넬 넘버 5를 만들어 준 조력자를 말이다.
샤넬의 사상은 그른 판단을 했을지 몰라도 샤넬의 패션 감각은 항상 옳았다. 1960년대 미니스커트가 유행했을 때도 샤넬은 기류에 편승하기 보다 미니스커트를 혹평하며 남자들이 여자를 왜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지 이유를 알겠다고 하였다. 샤넬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스커트 라인은 무릎 바로 아래 라인이었다.
헴라인 스커트의 창시자
1883년에 태어나 1971년에 생을 마감한 샤넬은 코르셋과 치렁치렁한 스커트를 심플하게 바꾸어 놓은 장본인이다. 행상인 딸로 태어나 12살에 고아가 되고 언니와 함께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지루하고 가난하게 살았고 그녀에게 귀속된 억압과 가난이 그녀를 해방시키고자 실용과 심플한 디자인을 탄생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샤넬은 편안한 의상. 심플한 고급스러움, 그러면서 여성스런 우아함을 찾아 노력했다. 모자 장사를 처음으로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아무튼, 1912년 샤넬모드를 세우고 빠른 성공을 거듭하며 신화적인 인물이 된다.
1921년 샤넬 향수 탄생
1921년에는 여전히 유명한 샤넬 NO.5를 만들어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샤넬은 귀족, 시인, 부유층, 예술가 등과 친분을 쌓으며 확고한 명성을 쌓아간다. 나치에 편승했던 오명 및 침체기를 딛고 샤넬은 1954년 재등장한다. 여전히 그녀의 이름 뒤에는 불명예란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녀가 만든 수트를 보고 그녀를 용서하고 그녀의 과오를 망각했다. 샤넬 수트는 샤넬이 죽은지 한참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매력을 유지하고 있다.
71세에 창작 포텐 터진 샤넬
1954년 다시 깡봉가에 문을 열고 금장 단추에 가장자리를 트리밍 처리한 수트, 이미테이션 악세사리, 골드 체인의 누빔 스티치가 들어간 백
투톤 슈즈 등 지금까지도 대표되는 어마무시한 디자인을 선보이며 대성공을 한다. 그것이 그녀 나이 71세때 한 일이다.
그리고 1971년 샤넬은 마지막 컬렉션 발표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칼라커펠트가 1983년 입성하였고 샤넬 전통을 고수하면서 독창성과 열정 그리고 고급스러움으로 샤넬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역량을 보여주며 인정을 받았다.
샤넬의 화장품 철학
여느 화장품 브랜드와 거의 비슷하게 샤넬도 클렌징-토닝-프로텍팅-리페어링의 4단계를 기본으로 한다. 잘씻고 수분 공급하고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하고 회복시켜주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스러운 관능미가 흐르는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샤넬 화장품이 지향하는 이미지다.
샤넬에서 만든 모든 제품은 효능보다는 럭셔리함을 추구할 뿐. 그리고 그것은 천박의 반대라고 말했던 샤넬의 말씀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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