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쑥한 몸, 유럽식 억양, 고귀한 분위기의 중성적 매력. 오드리 헵번은 단지 배우가 아니었다. 그녀는 전쟁과 고난, 사랑과 연민, 우아함과 저항의 역사 그 자체였다. 이 글에서는 헵번의 생애와 고난, 스타일, 그리고 유산을 따라가 본다.
1. 벨기에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천사
1929년 5월 4일, 벨기에 브뤼셀 인근에서 태어난 오드리 헵번의 본명은 에다 캐슬린 헵번 러스턴(Edda Katheleen Hepburn Ruston)이었다. 아버지는 영국인 은행가, 어머니는 네덜란드 귀족 출신이었다. 명문 가문의 후광 속에서 태어난 그녀는 2차 세계대전의 암운이 드리우기 전까지 유복한 유년을 보냈다.
2. 전쟁, 저항, 그리고 침묵된 가족사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헵번은 발레를 배우기 위해 네덜란드로 갔지만, 나치의 침공으로 가난과 굶주림, 공포 속에서 생존해야 했다. 이 시기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저항군의 전령으로 활동했다. 아이들은 수색 대상이 아니었기에, 서류와 돈을 숨겨 나르기 좋은 전달자였다. 반면, 헵번의 부모는 영국 파시스트 연합(BUF)의 회원으로, 나치와의 협력 의혹이 짙은 인물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히틀러를 찬양하는 글까지 기고했고, 아버지는 결국 가족을 떠났다. 헵번은 그런 부모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평생을 조심스럽게 살았다.
3. 배고픔이 만든 몸매, 삶을 바꾼 경험
헵번의 호리호리한 몸은 패션이 아니라 영양실조의 결과였다. 나치의 식량 봉쇄로 극심한 기아를 겪으며 그녀는 죽음을 가까이에서 목격했고, 이는 훗날 유니세프 활동으로 이어지는 내적 동력이 되었다. 전쟁은 그녀의 육체를 만들고, 정신을 각성시킨 장본인이었다.
4. 발레리나에서 세계적 배우로
전쟁이 끝난 후, 헵번은 암스테르담과 런던에서 발레를 배운 뒤 연극 무대로 나아갔다. 1948년 뮤지컬 합창단으로 데뷔하고, 곧 영화계로 입문한다. 1953년, 그레고리 펙과 함께한 『로마의 휴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의 정점에 오른다.
5. 사랑과 스캔들, 복잡했던 사생활
화려한 커리어만큼이나 헵번의 사생활도 복잡했다. 영국의 사업가 제임스 핸슨과의 약혼, 윌리엄 홀든과의 불륜, 그리고 배우 멜 페러와의 결혼과 유산, 바람, 이혼. 이어 이탈리아 의사 안드레아 도티와 재혼, 아들 루카의 출산, 또 다른 유산과 이혼. 마지막으로 네덜란드 배우 로버트 월터스와의 동거로 헵번의 사랑사는 끝난다. 그녀는 사랑에 솔직했고, 시대는 스캔들에 너그러웠다.
6. 유니세프 홍보대사, 그리고 마지막 여정
1980년대 말, 헵번은 화려한 무대를 뒤로 하고 유니세프 활동에 헌신한다.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구호 활동은 헵번의 전쟁 기억과 맞닿아 있었다. 1992년 소말리아 방문 이후 대장암 진단을 받고, 다음 해 1월 20일,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ㅍ죽기 직전, 그녀는 아카데미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그 상을 직접 받지는 못했다.
마무리: 슬픔에서 피어난 우아함
오드리 헵번은 슬픔에서 태어난 우아함이었다. 그녀의 미모는 가난과 고통을 뚫고 솟아오른 빛이었고, 그녀의 스타일은 단지 외형이 아니라 전쟁과 저항, 사랑과 상처의 기억이었다. 그녀는 단지 ‘스타’가 아니라, ‘기억’으로 남았다.
'color story > 뷰티 앤 패션 노하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케이트 모스 베스트 이미지 모음 (0) | 2020.12.29 |
---|---|
[beauty people] 알고보니 성형미인 마릴린 먼로 풀 스토리 (0) | 2020.12.28 |
2000년대 최고 인기 드라마 및 연예인 리스트(2000~2009) (0) | 2020.12.27 |
[model pic]Valeria Romanova (0) | 2020.12.25 |
[pink fashion] 핑크 매니아 그레이스 켈리 (0) | 2020.12.19 |
[fashion model]Anastasia koluseva (0) | 2020.12.18 |
80년대를 대표하던 최고 인기 연예인 리스트 (0) | 2020.12.14 |
가난한 룩(poor look)의 창시자 코코 샤넬 (0) | 2020.12.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