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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 story/뷰티 앤 패션 노하우

우리가 몰랐던 오드리 헵번의 라이프 스토리

by roo9 2020. 12. 21.

호리호리한 몸매, 유럽식 억양, 신비스러움, 귀족적인 용모를 지닌 오드리 햅번은 주변 사람들에게 가미네(gamine), 소년 같은 매력이 있는 사람으로 불렸다. 이렇게 미소년같이 중성적인 매력을 풍긴 오드리 헵번은 훗날 헐리우드에서 가장 위대하고 우아한 스타일 아이콘으로 남는다.

 

오드리 헵번의 뷰티풀 라이프 스토리

 

 

 

 

 

1929년 5월 4일 벨기에의 브뤼셀 아이젤스 태생이다. 그녀의 풀 네임은 Edda Katheleen Hepburn Rusto이다. 매우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난 헵번의 아버지는 영국 은행가였고 어머니는 네덜란드 남작의 딸이었다. 헵번은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무렵 런던의 기숙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전쟁 중에는 네덜란드의 콘서바토리에서 발레를 배웠지만 엄청난 가난을 체험하게 된다. 나치가 네덜란드를 침략한 후 헵번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닥쳤고 당시 레지스탕스의 편지를 전달해 주면서 저항 운동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헵번 가족이 시련을 겪은 일련의 사건은 훗날 헵번이 유니세프에 참여하면서 세계 곳곳의 불우한 어린 아이들을 돕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

 

 

 

 

 

 

헵번의 부모는 초기 나치의 동조자이자 영국 파시스트 연합 BUF의 회원이었다. 그녀의 엄마가 먼저 가입하였고 남편에게 가입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점점 더 열성 회원으로 활동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살려고 도망을 친 것인지 가족의 안전을 위해 은둔을 한 것인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고 결론은 아버지가 모녀를 떠났다는 것.

 

 

이에 관련한 내용으로 헵번의 아버지가 와이프의 재산을 탕진해가면서까지 나치군에게 협력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실한 건 아버지는 떠났고 헵번 모녀는 고생을 했다는 것. 그리고 헵번의 엄마 엘라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독일 장교들과 친교를 유지했고 교제를 하기도 했다고 함.

 

 

 

 

 

 

훗날 1940년 6월 영국 전투가 시작되고 헵번의 아버지는 BUF 회원 가입과 외국 파시스트 친구를 둔 덕에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다행히 헵번 모녀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고. 물론 정치적으로는 신뢰할 수 없지만 범죄에 관해선 무죄로 판명되었다. 헵번의 엄마 엘라는 히틀러도 직접 만났고 파시스트 잡지에 히틀러에 대한 찬양 글을 썼음에도 혐의없음으로 무마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하다. 아버지가 대신 뒤집어쓴 건 아닐까. 

 

 

 

 

 

 

이렇듯 헵번의 부모가 나치와 친밀했던 반면 헵번은 발레 공연으로 번 돈으로 저항군에 기부하고 다른 많은 네덜란드 아이들처럼 서류와 돈을 동봉한 문서를 배달하는 일을 도왔다. 나치가 어린아이들은 수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헵번의 부모가 파시스트적 성향이었고 자신 또한 그에 동조했음에도 어느 순간 저항군을 도운 이유는 나치의 잔혹성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유대인 친구들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것을 안 뒤로 적극적으로 저항군을 도왔다는 내용이 훗날 밝혀졌다. 이런 일들은 헵번에게는 미담이지만 햅번은 부모의 치부가 드러날까 탑스타가 된 후에도 전전긍긍하며 자신의 일을 비롯한 부모의 일을 철저하게 숨겼다. 

 

 

 

 

 

 

영국이 고향이나 다름없는 헵번이 전쟁 중 어머니의 고향인 네덜란드로 간 이유는 중립적인 네덜란드라 거기는 안전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치는 침략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살 길을 모색했음에도 나치가 국가적 차원으로 식량 공급을 끊어 헵번 모녀도 굶어 죽을뻔했다. 헵번의 비쩍 마른 몸매는 한창 자랄 나이에 제대로 먹지 못한 영양실조의 결과였다. 그리고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이 훗날 세계 각국 빈곤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천사가 되는 계기가 된 것.

 

 

전쟁이 끝난 후에도 헵번은 발레를 계속하며 연기자를 꿈꾸었었나? 헵번은 암스테르담과 런던에서 발레를 배웠고 1948년 런던의 한 뮤지컬 합창단으로 무대에 데뷔한다. 같은 해 헵번은 장편 영화 단역으로 출연한다.

 

22살의 헵번은 코믹 장르의 한 뮤지컬에 출연하기 위해 뉴욕으로 향했다. 일도 열심히 했지만 사랑도 열심히 했다. 그녀의 첫사랑은 영국의 사업가 제임스 핸슨이었고 1952년에 약혼했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진 못하고 미국 연극 제작자 아이클 버틀러와도 교제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953년 ‘로마의 휴일’로 그레고리 팩과 함께 세계를 강타한 최고의 배우가 되었다. 그녀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 해 다시 브로드웨이의 연극 무대로 돌아왔고 토니상 연극 부분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연극에서 주인공이던 두 남녀는 무대 밖에서도 사랑을 나눴고 1954년 9월 25일 멜 페러와 결혼한다.

 

 

 

 

 

그 전에 영화 사브리나 촬영 중 유부남 윌리엄 홀든과 불륜으로 파란을 일으킨 후 1953년에 관계를 끝내고 페러와 결혼한 것임. 헵번의 숱한 연애사는 이게 끝이 아니다. 헵번은 두 번의 유산 끝에 1960년 션이라는 첫 딸을 낳았다. 결혼 기간 중 둘다 엄청나게 바람을 피웠고 그래서 유산이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겠다.

 

 

헵번의 사생활은 정말 어메이징하다. 영화가 따로 없을 정도로 태생부터 성장 과정, 그리고 탑스타가 된 후에도 화제를 몰고 다녔다. 출산 후에도 여전한 미모를 과시한 그녀는 1961년 ‘티파니의 아침’이라는 영화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스타일 아이콘으로 거듭난다. 이 영화로 헵번은 네 번째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그밖에 헵번은 다양한 캐릭터로 분하여 많은 영화를 찍었다. 

 

 

1967년 ‘wait to dark’를 찍고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나 부부 관계는 틀어질대로 틀어져 1968년 이혼했다. 그 사이에도 쌍방간 나열할 수 없는 스캔들은 말 할 것도 없고. 뭐, 시대가 사랑이 넘쳐서 일반 가정도 비일비재한 일이긴 했지만…

 

 

 

 

1969년 헵번은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와 재혼했고 1970년 아들 루카를 낳았다. 1974년 또 다른 유산을 했고 둘의 결혼은 불륜으로 가득찼다. 결국 1982년 둘은 이혼했다. 도티와 이혼 후 헵번은 이혼 전부터 교제한 네덜란드 배우 로버트 월터스와 교제를 시작했다. 동거만 하고 결혼은 안 한 듯.

 

그녀는 점차 일을 줄이고 아이들 양육에 힘썼고 1980년대 말에는 유니세프 홍보 대사가 되었다. 아마도 여행 중 가난한 아이들을 보며 자신이 겪은 어린 시절을 회상했을 테지. 그녀는 독일 점령 기간 동안 배고픔이 어떤 건지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1993년 그녀의 인도주의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여했으나 헵번은 끝내 그 상을 받지 못했다. 

1992년 유니세프 소말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뒤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했으나 1993년 1월 20일 6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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