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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 story/뷰티 앤 패션 노하우

[beauty people] 알고보니 성형미인 마릴린 먼로 풀 스토리

by roo9 2020. 12. 28.

마릴린 먼로는 1959년 ‘some like it hot’으로 초특급 대박을 터트렸고 이 영화로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마릴린 먼로가 전세계 섹스 심볼이 되기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은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도 타고난 끼 위에 성형을 더한 성형미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알고 보니 성형미인 마릴린 먼로 라이프

 

성형 전후 마릴린 먼로 이미지

 

 

마릴린 먼로는 1926년 6월 1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병원에서 태어났다. 병원에 등록된 이름은 노마 진 모텐슨이었다. 노마진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할리우드의 필름편집자이던 글래디스 펄 먼로의 셋째 아이로 태어났다.  마릴린은 가족 중 세째아이였고 그녀의 어머니 글래디스 펄 베이커는 멕시코에서 태생이다. 외할머니 델라 먼로는 아일랜드 태생이고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다. 마릴린 아버지의 친부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지만 출생증명서에는 마틴 에드워드 모텐슨이 아버지라고 적혀있다.

 

마릴린 먼로의 어린 시절

 

 

마릴린 먼로 어린 시절 이미지

 

 

 

마릴린 먼로는 태어난 지 2주밖에 되지 않았을 때 캘리포니아 호손에 있는 외할머니의 이웃이 맡아 키웠다. 먼로 엄마의 정신이 온전치 못했기 때문이다. 먼로는 7살이 될 때까지 볼 렌더 가족과 지냈다. 그리고 1933년 가을 그녀의 엄마는 먼로와 함께 그들 집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불안정한 정신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먼로 엄마는 결국 1934년 정신분열증으로 입원한다. 그래서 글래디스의 친구 그레이스 맥키와 살기 시작한다.  그런데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레이스가 결혼했고 1935년 9월 13일 마릴린 먼로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고아원으로 보내져 1년 반을 넘게 살았다. 먼로의 불안하고 불행한 방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37년 6월, 그레이스는 고아원에서 먼로를 데리고 나왔다. 그러나 그레이스의 남편 어윈 고다드가 먼로를 성추행하여 그레이스는 이모 올리비아 브루닝스에게 보냈다. 하지만 거기서도 얼마 머무르지 못했다. 올리비아 아들 중 한 명이 마릴린을 추행하려 했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의 마릴린 먼로 그리고 조혼

 

먼로의 성장기 사진

 

1938년 초 그레이스는 마릴린을 웨스트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다른 이모에게 보냈다. 마릴린은 이 기간 동안 애머슨 중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모의 건강 문제 때문에 고다드 가족에게 돌아왔다. 여기서 마릴린 먼로는 반 누이스 고등학교에 등록했다. 학창 시절 먼로는 남자 더허티를 만났다. 이건 자발적 만남이 아니고 미성년에 가족 문제 등 다시 고아원으로 보내질 수 있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일종의 도피처로 선자리를 알아봤다는 게 맞다. 한국식으로 선을 보고 조혼을 올린 거다.

 

 

그리고  21살의 제임스 도허티와 결혼했다. 1942년 6월 19일 그녀 나이 16살 때의 일이다. 결혼 후 마릴린은 그의 집으로 이사했고 먼로는 고교를 중퇴했다.

 

 

결혼 후 모델 생활 시작 그리고 이혼

 

 

 

결혼 후 마릴린 먼로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마릴린 먼로는 그때를 이렇게 말했다.

 

“결혼은 나를 슬프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남편과 나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가 화가 났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루해서 죽을 것 같았다.”

 

1년 후 제임스는 해군에 입대했고 둘은 카탈리나 섬에 살았다. 1944년 제임스는 태평양으로 가야 했고 마릴린은 시댁으로 이사했다. 거기서 마릴린은  군수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45년 6월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마릴린은 군수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홍보 사진을 찍으러 온 사진작가 코노버의 눈에 띈다. 코노버는 마릴린에게 한 포즈당 5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먼로는 모델 일을 하기 위해 공장을 떠났다. 모델 일에 눈을 뜬 먼로는 1945년 8월 2일,  캘리포니아 주의 한 에이전시 문턱을 두드렸고 관계자들은 그녀의 참신한 외모를 보고 계약하였다. 

 

그녀는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를 펴고 금발로 염색했다. 기획사에서 마릴린 먼로는 가장 열정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모델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또한, 성공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키워주겠다 싶은 남자들에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상납을 했다. 

 

1946년 화려한 인생 시작

 

1946년 봄, 마릴린 먼로는 모델 생활 반년 만에 33개의 잡지 표지를 장식했다. 같은 해 8월, 20세기 폭스사와 계약을 맺었고 그들은 마릴린 먼로를 ‘금발의  소녀’란 캐릭터로 만들었다. 그녀에겐 노마진이란 이름보다 세련된 예명도 필요했다. 거론된 이름도 있었지만 먼로는 자신의 엄마가 처녀 때 불리던 이름을 쓰기로 하였다. 그렇게 해서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이 탄생하였다.

 

 

마릴린 먼로의 성형 전후 이미지

 

 

성형 전후 이미지

 

 

 

마릴린 먼로는 머리색과 이름만 바꾼 게 아니다. 마릴린은 여러 번의 성형수술을 받았다.

 

 

코와 턱의 모양을 몇 차례 바꿨고 비로소 대중이 열광하는 섹스 심볼이 되었다. 마릴린 먼로가 유명해질수록 첫 남편 제임스 더허티와 불화로 이어지고 1946년 9월 둘은 결혼 생활 4년 만에 이혼했다. 폭스사에서 이렇다 할 흥행을 못하자 계약은 파기되고 먼로는 콜롬비아로 기획사를 옮겼지만 여기서도 별다른 작업 없이 결별한다.

 

이러한 먼로를 구원해 이는 먼로보다 30살 연상인 WMA 에이전시의 부사장 조니 하이드였다. 그는 먼로의 매력에 반하고 그녀의 살아온 인생을 측은히 여겨 기꺼이 그녀의 스폰서가 돼준다. 조니는 먼로에게 빠져 그녀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조니는 그녀를 위해 막대한 성형수술 비용도 지불했고 1950년 개봉한 영화 ‘love happy’의 작은 배역을 주선했다. 그리고 먼로를 위한 헤어드레서 및 연기 선생도 붙여주었다. 먼로를 위해 아내와 자식까지 등진 조니의 헌신적인 사랑에도 불구하고 마릴린은 자신의 야망을 위해 그의 프로포즈를 거절하고 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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