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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인문학)

[책맛보기]한국대중문화예술사

by roo9 2020. 4. 27.

 

김정섭, 한국대중문화예술사, 한울아카데미,2017

 

문화란 한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자연을 변화시켜온 물질. 정신 과정의 산물이다. 사회 구성원이 습득.공유.전달한 행동양식이나 생활양식의 과정을 모두 포함한다. 10.

정신적이고 지적인 발전상을 문화로 정의할 경우 문명 civilization 은 물질적 기술적 진보나 발전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문명은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 생활에 대비되는 것으로 인류가 이룩한 물질, 기술, 사회구조의 발전상을 뜻한다. 보통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으로 구분한다. 10.

 

대중예술과 대중문화

대중예술은 대중적으로 인정받는 통속적인 예술을 가리키는 말로 영화가 태동한 19세기 후반부터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대중예술의 영향에 힘입어 형성된 것이 대중문화이다.popular culture. 대중문화는 사회구성원이 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대중에 의해 생겨난 문화로 사회의 일부에 속하는 엘리트나 귀족층만의 전통적인 고급문화와 토착적인 민속문화 사이에 나타난 중간적 특징의 문화를 의미한다. 다수가 향유하는 문화를 대중문화 popular culture 라 하고 대중이 아닌 매스미디어의 주도적 영향력으로 형성되는 문화를 매스 컬쳐로 구분하기도 한다. 미디어 기술이 디지털화하면서 형성되어 새롭게 발전한 문화를 디지털 문화라고 한다. 16.

 

대중문화에 대한 평가는 태동기때부터 다양했다. 귀족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학자나 비평가는 보수적인 관점을 나타내기도…

 

예술은 아름다움이나 미적 가치를 구현하는 인간의 모든 창조적 활동을 뜻한다. 

예술은 테크네의 의미 변천에서 볼 수 있듯 16세기까지 기술이란 뜻으로 통용되었다. 18세기가 되면서 예술이 오늘과 같은 의미로 자리 잡았다.

예술가의 자질과 덕목

예술가에게는 창작의 밑바탕이 되는 근원적 에너지로서 심미안과 창의성이 요구된다. 예술가들은 우리 주변에 산재한 잠재력 있는 창작 재료들을 찾아 그것을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낼지 자신의 미적 감각을 투영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구상해야 한다. 심미안과 상상력은 다양한 재료를 새롭게 위치 지음 positioning 으로써 구체성을 부여하는 예술적 직관이자 에너지라 할 수 있다. 예술은 주변에 산재하는 다양한 재료에 이렇듯 기발한 생각과 직관이 결합되어 탄생한다. 26~27.

coldplay

심미안에 관해

예술가로서 심미안을 기르는 방법은 다양한 생각의 재료를 확보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심미안을 강화하려면 현재에 집중, 부지런히 다양한 예술을 향유,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거나 인정받으려는 욕구에서 탈피해야 한다. 예술 작품의 제작 문법과 흥행 트렌드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에너지로 승화시켜야 한다. 여행과 트레킹 등 탐사. 레저 활동을 통해 자연과 역사와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거주하거나 일하는 주변 환경을 예술적으로 단장해 항상 예술적인 분위기에서 착상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술가는 창의성과 함께 몰입 immersion 과 영감을 의미하는 엔토우시아스모스 enthousiasmos 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몰입은 무언가에 흠뻑 빠져있거나 심취해 무아지경인 상태로, 심리적 즐거움과 만족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매우 집중된 상황을 말한다. 예술적으로는 창작이나 표현을 위해 현실감각을 잃을 만큼 깊이 빠져든 집중 상태를 의미한다.

 

 

contemplation

 

관조

 

lunacy

광기.

authenticity

진정성

 

 

항상 새로운 것을 창출해야 하는 예술가에게 가장 강력한 적은 두려움이다. 예술가는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예술가가 직면하는 두려움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진지한 성찰, 동시대 예술가를 향한 경쟁심, 미래를 둘러싼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 30.

 

 

미스터트롯

스타가 되려면 지덕체는 물론 재능과 실력을 갖추고 노력과 운이 뒤따라야 한다. 31. 스타가 되면 누리는 것만큼 유의해야 할 것도 많아진다. 스타는 준공인의 위상을 갖기 때문이다. 향유하는 무게만큼 조심해야 할 부담이 늘어나는 것이다. 32.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대중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적 신분에 비례.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말한다. 따라서 아티스트는 스타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사생활을 잘 관리하고 신중한 언행을 펼치는 등 매사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32.

 

 

근대국가 형성기

근대국가 형성기에 우리나라는 신분제 폐지와 주권 운동, 개화사상과 서구 문물의 유입 등으로 누구나 향유하며 창작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대중문화예술의 소중한 씨앗을 마련했다. 영화. 신극, 가요, 서양 패션 등 대중문화예술 콘텐츠 부분은 우리나라보다 개방이 조금 빨랐던 일본이나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서 유입되었다. 활동사진, 변사, 음반 발전의 토대가 된 유성기 음반 gramophone record가 들어오고, 현대연극의 출발점인 신극을 극장에서 볼 수 있게 됨.

1901년 9월 7일 군악대 지휘자로 초빙된 독일의 음악가가 작곡한 대한제국 국가가 처음 연주되었다.

여전히 전통음악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유성기와 같은 새로운 음악기기 도입으로 변화가 생겼다. 유성기는 음파를 기록한 음반을 회전해 음성을 재생하는 장치로 축음기의 옛말이다. 유성기의 출현과 도입은 소리 기록의 역사와 연관이 깊다. 55.

 

세계에서 소리를 처음으로 기록한 사람은 1857년 프랑스인 에두알 레옹 스코트 드 마르탱빌 으로 소리의 파동을 먹지에 그래프처럼 그리는 방식으로 기록했으며 이런 원리를 반영한 축음기를 처음 발명했다. 이어 미국의 토마슨 에디슨이 1877년 녹음과 재생이 가능한 원통형 축음기를 발명했다. 이후 1899년에 동전을 넣으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주크박스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팔라이스 로열 레스토랑에 등장했다.국내 유성기 문화는 1866년 충청남도 아산만에서 통상을 요구한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지방 관리를 초청해 연회를 열고 프랑스인이 만든 유성기로 음악을 들려준 것이 시초다. 이후 1899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유성기에 음반을 취입했다.

 

일제 강점기

 

최초의 라디오 방송은 1927년 2월 서울 정동 1 번지 2층 건물에 경성 방송국이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1910년부터 등장한 신파극은 일제 식민지의 여파로 유입된 일본풍의 연극이다.  이 극에서 테마곡은 트로트가 중심을 이뤘다. 

악극단의 순회공연은 신파극과 창작극의 구전 확대 외에도 대중가요를 널리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전축, 라디오, 음반 산업을 비롯한 대중매체나 미디어 기기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89.

음반이 도입되면서 오케레코드 산하 조선악극단은 1935년 2~3월에 이난영, 임방울, 고복수 등이 출연하는 <오케 예술의 밤>을 순회공연했다. 89.

유성기 음반이 일본을 통해 조선에 들어오고, 1910년 일본 축음기상회와 서양 음반 회사의 지사가 서울에 설립되면서 가수들이 레코드 음반을 내기 시작했다. 1913년부터 1925년까지 나팔통식 취입이라 불리는 기계식 취입법을 통해 우리 음악을 많이 녹음. 발매했다. 라디오 방송국이 생기고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레코드의 보급은 점차 늘어났다, 유행가도 등장했다.

대중가요는 크게 트로트, 신민요, 재즈, 만요가 유행했으며 군국 가요도 불렸다. 가요 중에는 번안한 노래가 많았다. 일본에서 유입된 엔카 영향으로 1920년대부터 왜색 풍의 트로트가 유행했다. 트로트란 말은 1910년대 초기 미국에서 시작된 사교춤곡 중 하나인 폭스 트로트 fox trot에서 유래했다. 폭스 트로트는 여우의 걸음이라는 의미로 여우가 사냥감을 향해 살금살금 걸어가듯이 추는 춤이라는 뜻이다. 91.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이자 음악 교사, 그리고 신극 운동을 하던 배우 윤심덕은 1926년 8월 1일 사의 찬미를 발표했다. 이 음반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해방기와 이승만 정부 시대

 

이승만 정부의 핵심 과제는 전쟁 이후 어떻게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느냐였다. 미국에 의존해 폐허가 된 인프라와 산업 시설을 되살리는 전후 복구 사업을 진행하면서 물자 절약을 위해 신문과 방송 등으로 절미운동과 혼.분식 장려운동을 전개했다. 미국 군정시대 이후 미군의 주둔과 그 여파로 음악, 영화 등 서구의 대중문화가 유입되면서 대중음악은 일본식 5음계에서 서양식 7음계로 바뀌었다. 구체적으로 트로트가 서구의 팝을 만나 현대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이었다. 댄스 음악도 활기를 띠었다.

대중음악이 활기를 띠면서 미군 부대와 그 주변, 서울 명동, 충무로, 무교동 등 도심을 중심으로 클럽(댄스홀), 무도장, 음악다방, 음악 감상실 등이 생겨났다. 이러한 경향은 시민들에게 서구화, 개방화, 향락주의를 만연시켰고 아울러 사교춤 열풍, 춤바람, 불륜, 제비족과 같은 신종 용어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서구화 바람을 타고 서구식 혼례를 치르는 서양식 결혼식장이 서울에 처음 생겼는데 그곳은 영등포의 중앙예식장이었다. 자유연애와 신분 상승 욕구도 강하게 분출되었다.

 

1960~1970년대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부(1961)에 이어 출범한 박정희의 공화당 정부는 집권 직후부터 1950년대와 마찬가지로 문화에서도 독재, 반공주의, 검열과 통제를 강화했다. 민족주의를 국가 지도 이념으로 설정했다. 영화법과 방송법을 제정해 미디어와 대중문화를 통제했다.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문화가 생산. 확산되고, 대중은 이를 소비하면서 새로운 문화환경을 접하게 된 것이다. 외국의 대중음악이 유입. 정착되고 티비 방송이 본격화되면서 우리 사회에 대중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대중음악에서는 트로트, 스탠더드 팝, 포크송 로큰롤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골고루 인기를 누렸다. 1960년대 가요은 내용 면에서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다룬 노래가 많았는데 감성적 소재가 자주 등장했다.

미 8군 무대에서는 신중현, 펄시스터즈, 김추자, 장현, 박인수 등이 팝과 로큰롤을 결합한 음악은 선보이며 인기를 누렸다. 특히 미 8군 부대는 무교동 음악 다방 세시봉, kbs가수선발대회 등과 함께 신인들의 등용문으로 기능했다. 대표적으로 신중현에 이어 조용필이 미 8군 무대 출신이다.

대중음악계에는 외형적으로 새로운 스타일이 시도되었다. 여성 듀엣과 트리오가 생겼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가수도 처음 나타났다. 오빠부대의 원형도 만들어졌다.

1960년대 전반기 여가 문화의 경우 대학생은 음악 감상, 독서, 사색, 무전 여행 등을, 일부 상류층은 등산, 낚시, 하이킹 등을 즐겼으나 1966년 이후 경제가 고도로 성장하면서 여름철 바캉스가 보편화되고 회사 단위 들놀이가 새롭게 성행했다.

1970년대는 서구의 사조와 문화의 영향으로 청년문화가 태동해 젊은이들 사이에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베트남 전쟁 이후 반전과 평화운동 기류, 성과 중심 자본주의의 폐해 등에 대한 각성으로 태동해 서구 사회를 휩쓴 진보적 운동이 국내에 유입되며 형성되었다. 이런 흐름은 대학생 등 20대를 사로잡아 팝 음악, 생맥주, 티셔츠와 청바지, 장발 등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적 요소와 결합해 급속히 퍼졌다. 특히 로큰롤 가수와 포크 가수가 이러한 풍조를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

대중문화가 사업이 된다는 의식이 널리 퍼지면서 대기업이 참여하는 가운데 문화산업의 기초적인 토대가 형성.

팝과 포크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감상적인 내용이 담긴 트로트도 계속 발전했다. 트로트는 남진, 나훈아, 이미자, 패티김, 송대관, 포크에서는 이장희, 김민기, 양희은 등이 있었다.

박인수는 1960년대 미8군 무대 경력을 바탕으로 불멸의 히트곡 봄비를 불러 한국 소울의 대부로 평가 받았다.

한대수는 포크 록의 시대를 열었다.

유신 정권 시기에는 유신 통치에 방해가 되는 청년문화와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젊은이들의 향유물이자 선망의 대상이던 대중문화와 연에인을 겨냥해 억압했다. 정부는 1975년부터 금지곡을 남발하고 연예인의 외국 예명 사용을 금지하는 동시에 대마초를 피운 연예인을 대거 검거.

연예인 대마초 사건은 1975년 12월에 연예인과 약사 등이 연루된 흡연 사건으로 가수 김정호, 김세환, 장현, 박인수와 코미디언 이상한, 이상해 등은 구속 또는 불구속 입건되었다.

1980년대

18년간 이어진 박정희 군사 정권의 종식 대신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출범하면서 1980년대 대중문화는 통제와 유화의 두 가지 모습으로 흘러갔으며, 민주 대 반민주라는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곳곳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신군부 정권은 대중문화를 통해 국민들의 의식을 통제하려 했고 대학가, 노동계, 재야, 시민사회에서는 그러한 정치적 의도를 저지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 활동을 전개했다.

신군부의 3s정책은screen, sex, sports를 동원. 진흥해 체제 비판을 무력화하고 관심을 다른데로 돌리기 위한 우민화 정책이었다.

1980년 12월 1일에는 컬러 티비 방송이 시작되었으며 vtr이 보급 확산 되면서 비디오숍이 생기기 시작했따. 미국과 일본 등에서 몰래 수입되어온 포르노 테입도 퍼져나갔다.

1982년 1월 4일에는 학생들 교복 및 두발 자유화 조치가 실시되고, 1월 5일에는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했다. 37년 만에 야간 통금이 해제되어 이른바 밤 문화가 형성되면서 성 풍속 분야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경찰은 사창가인 집성촌 단속을 묵인해 성매매 업소가 급증했다.

컬러 티비의 보급은 정치적 목적에서 출발했다.  결과적으로 대중문화 형성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특히 대중문화의 핵심 소비 계층인 10대 청소년 문화시장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조용필을 시작으로 오빠부대가 등장했다. 10대 취향의 댄스곡이 선풍적 인기를 누리며 전영록, 김완선, 김승진, 박혜성, 소방차, 박남정, 등 비주얼과 댄스를 강조하는 젊은 비디오형 가수가 등장했다.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서구의 팝 음악 대신 한국 가요가 음악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종환의 디스크 쇼,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이수만의 젊은 음악캠프,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이택림의 가요 중계실 등이 인기를 모았다.

거리에는 노점상들이 판매하는 불법 복제 음반이 등장해 인기를 끌었는데 여기에서 팔린 테이프 순위도 팬들의 수요를 대변하는 가요 순위라는 뜻으로 길보드 차트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 시기 최고 인기 가수는 조용필, 전영록, 이선희, 주현미, 최성수, 김완선, 이지연, 소방차, 김범룡, 이상은 등이었다.

이광조, 이문세, 변집섭, 이승철 등 발라드 가수도 인기를 끌었고 ,들국화, 임재범, 한영애 등 로큰롤을, 김현식과 유재하는 소울 블루스로 두각을 나타냈다.

1987년 이후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대중문화시장에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는 등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6.29 선언 이후에 치러진 첫 총선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되면서 방송법 개정 등을 통해 표현의 자유가 제도적으로 확대되었다.

1990년대

1990년대는 군사정권의 독재정치와 잘못된 역시 인식의 그늘에서 벗어나 대중이 능동적인 사회변혁의 주체로 나서면서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대중문화예술 분야에서도 반독재 투쟁을 이끄는데 앞장섰던 민중문화가 대중문화와 어우러지며 점차 제도권으로 편입되었다. 민주화 초기인 1990년대 초반에는 민중가요와 대중가요가 차트를 휩쓸고, 정치 비판을 담은 진보적 영화가 개봉되는 대중문화의 정치화 현상이 두드러졌으나 중반부터는 개인화, 탈정치화 션상이 나타났다.

1995년 wto 체제가 국내에서도 비준되면서 문화계도 개방 물결이 생겼다. 민중문화가 대중문화에 흡수되고 상업화가 촉진되었다. 영화, 드라마, 가요 등 대중문화 전반이 활기를 띠며 대중의 문화 소비가 급속히 늘어났다. 미디어 기술의 발전으로 정부와 기업은 새로운 기업을 찾으려 했다. Pc통신, 휴대전화, 인터넷, 다운로드 기술, 무선 전송 기술 등이 차례로 도입되면서 커뮤니케이션과 대중문화의 유통 방식에도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이른바 다매체 다채널 시대가 열렸다. 비주얼 혁명과 쌍방향 소통 시대로 이끌었다. 208.

미디어와 신세대 문화가 선순환 발전하면서 대중음악은 여러 색갈로 분화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데뷔한 가수들이 황금기를 누린가 하면 힙합, 랩, 리듬앤블루스 처럼 세부 장르 가수들이 속속 등장,

1990년대 후반부터는 서태지와 아이들, hot, 젝스키스를 비롯한 감성세대 그룹 가수들이 등장해 10~20대 팬들을 주축으로 폭발적 인기를 누리며 2000년대까지 아이돌 음악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랩과 힙합 댄스를 가미한 파격적인 댄스음악으로 신세대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1992년 4월 11일 mbc 특종 tv 연예를 통해 첫 신곡 소개 난 알아요.로 데뷔했다.

당시 방송에서는 혹평했지만, 그 뒤 거의 모든 청소년이 추종할 정도로 서태지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후 한국형 아이돌 그룹이 양산 되엇고 1996년 남자 아이돌 hot 

1997년 ses

1998년 dsp 엔터테인먼트는 핑클

2000년에 접어들면서 이효리가 섹시 아이콘으로 선풍적인 인기.

인디음악도 크게 성장하면서 인디 뮤지션 크라잉 넛, 노브레인, 자우림과 같은 스타가 배출되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신촌과 홍대 중심으로 인디 문화를 즐기며 소통하는 홍대 문화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홍대의 인디클럽 공연은 1996년 클럽 드럭drug에서 열린 록그룹 너바나의 보컬 커트 코베인 사망 1주기 추모 공연이 시초가 되었다.

기타리스트 원종우는 1996년 우리나라 최초로 혼자 작사. 작곡. 연주, 레코딩, 믹싱한 독립 앨범을 발표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는 일본 대중 문화를 단계적으로 개방해나갔다.

1990년대 후반에는 각종 참사로 대중문화가 위축되고 imf가 찾아와 국민의 문화 소비가 급감하였다. 때아닌 국가 부도사태는 영화계과 음악계를 크게 침체시켰으며 방송 산업을 위축시켜 도산 후 인수합병을 당하는 케이블 티비 채널도 늘어났다. 음반 시장의 위축은 인터넷 등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 음반 구입 대신 디지털 파일을 다운로드받아 감상하는 쪽으로 대중의 취향이 변한 탓도 있었다. 오프 라인 음반 시장은 쇠락의 길로 접어드 반면 인터넷 음악 시장은 성장세를 가속화했다.

2000년대 이후

 

2000년대는 경제가 외형적으로 외환위기 후폭풍에서 벗어나고 한일 대중문화 개방 조치와 주 5일제 전면 실시 등의 영향에 힘입어 대중문화가 전성기를 맞았다. 드라마, 영화, 가요가 안정적 토대를 구축하고 디지털 기술과 애니메이션 등의 발달로 컴퓨터 게임과 같이 대중문화와 연관된 콘텐츠가 크게 성장했다.이 시기에는 한류 열풍이라는 예기치 않은 문화적 현상이 일어나 대중문화예술계는 물론 사회 전반을 크게 변화시켰다. 2008년부터는 케이팝 한류가 불타올라 한류의 국제 용어인 케이커쳐라는 말이 등장했다.

2000년대 대중음악 분야는 아이돌과 복고음악이 전성기를 누렸다. 

2009년부터 시작된 오디션 프로그램은 시청자와 깊은 교감해 선풍을 일으켯고 imf이후 위축된 음악 시장이 부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기존의 아이돌 그룹의 활동 기간이 오래되면서 세대교체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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