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 로렌 바콜의 첫사랑이자 첫 남편이던 험프리 보가트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배우 1위에 오른 문화 아이콘입니다. 중절모를 쓴 탐정 캐릭터 이미지를 완성하였으며 트렌치코트가 잘 어울리는 어딘가 냉혹하고 비정한 하드 보일드의 남자로도 유명합니다. 미국인들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로 극찬을 받고 있는 험프리 보가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험프리 보가트의 출생과 성장
헐리우드의 터프가이이자 일상에선 냉소적 은둔자로 불린 험프리 보가트는 1899년 12월 25일 뉴욕 리버사이드 104번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외과의사였고 어머니는 일러스트작가였습니다. 둘 다 어마무시한 집안 출신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돈을 더 잘 벌었지만 험프리의 어머니는 말년에 자살하였고 아버지는 마약 중독으로 돌아가셨습니다.
1남 2녀 중 장남인 험프리는 매우 유복하면서 부모의 정이 없는 냉소적인 가정에서 성장하였고 학교 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으며 매사추세츠에 있는 필립스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 1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해군에 자원 입대합니다. 사실 애국심은 핑계고 학교를 중퇴한 것에 대한 부모의 분노와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회피성 입대를 한 것으로 보는 게 맞습니다. 그리고 입대해서 평생 지울 수 없는 입술의 유명한 흉터를 갖게 됩니다. 그것도 싸우다 다친 흉터가 아닌 담뱃불을 붙이다가 사고가 났다는 말이 있지만요 아무튼, 그의 찢어진 윗입술은 저명한 의사였던 아버지가 꿰매주셨고요.
하지만 그는 1919년 6월 명예롭게 제대하였고 그의 어머니도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선박회사 그리고 제과회사 등에서 일하다 집안 소개로 브로드웨이의 영화 사무실에 취직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아팠고 그렇게 의리의리하던 집안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배우의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극단의 매니저가 된 후 우연한 계기로 대역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인 연기 생활을 하게 됩니다.
험프리 보가트의 매력과 개성
험프리 보가트는 미인의 시대에 부합되지 않은 다소 투박하고 거친 외모의 소유자였습니다. 상처가 있는 얼굴은 앙상했고 거친 분위기의 현실적인 외모에 가까웠습니다. 키도 173cm의 비교적 단신에 속했고요. 하지만 남다른 상남자 포스로 우수에 찬 표정 그리고 위스키를 즐기는 그런 모습은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그가 유명해지기 전 이런저런 단역을 맡아 연기 경력을 쌓는 동안 보가트는 두 번의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의 첫 번째 와이프 헬렌 멘켄은 그보다 10살 연상의 성공한 여배우였습니다. 어찌 보면 헬렌 멘켄에게 간택을 당한 셈인데요. 보가트는 그녀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았지만 1926년 5월 20일에 결혼했습니다. 결국 그 결혼은 1년도 못 가 끝났습니다.
보가트의 두 번째 결혼
보가트의 두 번째 와이프 메리 필립스도 연극 배우였습니다. 둘은 1923년 친구 소개로 만났고 그들은 1928년 4월에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험프리에게도 배우로서 성공할 기회가 찾아오게 됩니다. 거의 십 년 동안 무명배우로 살던 그는 1934년 영화 석화된 숲에서 악역을 맡으면서 대중의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었습니다. 그리고 보가트가 잘 나가게 되면서 메리 필립스와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메리 필립스와 헤어진 후 보가트는 시끄럽고 예측하기 어려운 성격의 마요 매소트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둘은 1938년 8월에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결혼은 처음부터 떠들썩했고 마요는 매우 난폭한 성질에 알콜 의존증으로 고통받았습니다. 더불어 과도할 정도로 질투심이 심했습니다. 둘의 잦은 말다툼은 보가트의 폭력으로 이어지게 되어 그는 배틀링 보가트란 불명예스러운 별칭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불행한 결혼으로 서로 술도 어지간히 부어라 마셔라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카사블랑카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로 등극
조폭, 범죄 전문 배우로 특화된 보가트는 2년 동안 12개의 영화를 찍었고 나름 인기와 명성을 얻었지만 이 세계에 곧 싫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찰나에 보다 다른 장르에 눈을 뜨게 됩니다.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로맨틱 전쟁 드라마 카사블랑카의 주인공이 된 것이지요.
당대 최고로 재능있는 미녀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과 험프리 보가트는 완벽한 케미를 보여줬습니다.
실제로 험프리 보가트는 잉그리드 버그만보다 키가 작았지만 일련의 장치로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고요. 둘이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이로 보이기도 했지만 실제 보가트는 잉그리드 버그만을 그렇게 흉을 보았다고 하죠? 아무튼, 이 작품 이후로 험프리 보가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가 되었습니다.
운명적인 여인을 만나다
1944년 이 섹시하고 개성 있는 배우는 신인 여배우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됩니다. 첫 작품에서 주연을 맡은 로렌 바콜과 험프리 보가트가 사랑에 빠지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끝나자 험프리 보가트는 병든 결혼을 끝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였고 1945년 5월 10일에 끝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이혼한 지 2주도 안 되어 5월 21일 로렌 바콜과 험프리 보가트는 결혼했습니다. 로렌 바콜의 나이 스무 살이었고 험프리 보가트는 45살이었습니다.
보가트는 비로소 모든 것을 얻은 듯했습니다. 스무 살 이상 어린 젊고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배우 로렌 바콜과 함께 여유로운 주택에서 애완동물 14마리와 8마리의 오리 등을 키웠고요. 워너브라더스사와 15년 동안 계약을 하면서 일 년에 백만 달러를 보장받는 파격적인 계약으로 경제력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1947년 보가트에게도 첫 아이 스티븐 험프리를 낳았고 3년 후 딸 레슬리를 낳았습니다. 보가트는 비로소 행복과 안정을 찾았습니다. 1952년에는 캐서린 헵번과 함께 찍은 영화 아프리카 여왕에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요. 이후 사브리나 등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출중한 영화들의 주연을 맡아 대체불가 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완벽한 행복을 부여하지 않는 질투쟁이란 것을 잠시 망각했던 것일까요? 1956년 험프리 보가트는 아직 전성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스카치 위스키는 제 인생에서 매우 가치 있는 부분이라고 말하더니만 식도암에 걸렸고 완치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1957년 1월 14일 이른 아침 신의 곁으로 갔습니다. 그의 나이 57세였습니다.
다시 험프리 보가트의 음주 라이프를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그는 위스키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건강한 식사에 대한 경멸을 보였다고 하는데요. 점심에는 스카치와 탄산음료 두 잔 그리고 프렌치 토스트와 브랜디 한 잔을 마셨다고 합니다. 밤낮없이 반주삼아 위스키를 즐겨 마셨는데요 구운 콩에 통조림 아스파라거스르를 먹을 때도 스카치위스키가 빠지지 않았고요. 스파게티 식당에서도 스카치와 미네스트로네 수프만 마셨다고 합니다. 물론 로렌 바콜과 결혼 후 그녀의 충실한 내조로 성실하고 침착하며 책임감 있는 남자가 되긴 했지만 그의 음주는 멈추질 않았습니다. 대수술을 받고 죽기 전날 까지도 스카치와 마티니를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하니 할 말이 없습니다. 게다가 지독한 흡연가였다고 하니 식도가 견딜 수가 없던 겁니다.
험프리 보가트의 카사블랑카에서 말한 불멸의 대사 here's looking at you, kid 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요. 그가 죽기 전 아내 로렌 바콜에게 한 말은 see you kid, hurry back이었다고 합니다. 로렌 바콜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겠다고 말한 직후에 한 말이었겠죠. 험프리 보가트가 남긴 수많은 명대사가 있지만 죽기 마지막 말이 저의 가슴을 가장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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