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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인문학)/모든것의 역사

[한국 역사] 고려의 모든 것

by roo9 2020. 12. 26.

송악의 호족 왕륭과 왕건 부자는 궁예로 휘하로 들어갔다. 궁예는 이들의 도움으로 수도를 송악으로 옮겼다. 궁예의 신임을 얻은 왕건은 913년 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궁예는 왕이 된후로 의심이 더 많아졌다. 905년 수도를 철원으로 옮긴 후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하였다. 궁예는 미륵관심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본다고 하면서 많은 이들을 의심하고 죽여버렸다.

 

궁예에서 왕건으로 

 

 

 

918년 신숭겸,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정변을 일으켜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을 내세워 국호를 고려라고 하고 수도를 송악으로 옮겨 개경이라 하였다. 왕건은 궁예와 달리 자신을 낮추며 지방 호족들을 회유하였다. 왕건은 호족 출신이었다.

 

후삼국 통일

고려는 후백제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차지하였고 갈팡질팡하던 신라는 도망쳐 온 견훤을 받아주며 대우하자 신라 경순왕도 고려에 항복한다.

왕건은 이들을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이렇게 신라를 통합한 고려는 후백제를 공격하였다. 후백제는 견훤이 넷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견훤이 고려로 도망친 것. 936년 마침내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왕건은 여러 호족의 딸들과 결혼하여 29명의 부인을 두었다. 왕건은 후백제를 대결하는 가운데 북방 개척과 서경을 중시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발해 유민도 받아들였다.

 

호족 억압과 왕권 강화

 

 

조세와 부역을 가볍게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관료들에게 역분전을 지급하였고 호족을 우대하는 한편 억누르는 정책을 실시했고 자손들에게 훈요 십조를 남겼다.  2대 혜종과 3대 정종 때에는 왕위를 노린 반란과 음모가 자주 일어났다. 태조 왕건이 호족의 딸들과 결혼시킨 이유가 크다.

 

4대 광종이 즉위한 이후 호족 세력을 꺾고 강력한 왕권을 다져갔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양인으로 호족의 노비가 된 경우는 다시 양인이 되게 하였다. 이로써 국가 재정 기반은 확대되고 호족은 약화되었다. 광종은 귀화인들을 널리 등용하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과감한 개혁과 숙청으로 왕권을 강화하였고 스스로 황제라 일컫고 광덕, 준풍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하며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라 불렀다.

 

경종 때에는 관료들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인 통일 신라 관료전 같은 전시과를 처음 사용하였다.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렸고 이를 받아들여 통치체제를 구축하고 유교 의례를 갖추는 일도 힘썼다. 태조의 훈요에 따라 불교를 매우 중시했다.

 

고려 지배체제의 확립

 

중앙의 정치는 문하성, 중서성, 상서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왕명의 출납과 왕궁 호위, 군사 기밀을 담당하는 중추원이 있고 그것의 하위직은 승선으로 왕의 비서 역할을 수행했다. 회계와 재정을 맡은 삼사. 관리들을 감독하는 어사대. 중서문하성의 하위직 관리인 낭사들과 어사대의 대관들은 간관으로 관료들의 부정과 비리를 규찰, 탄핵하는 일도 맡았다.

 

재상들이 모이는 회의 기관으로 도병마사가 있어 국방과 군사 문제를 논의했다. 법제와 격식 등을 관리하는 기관으로는 식목도감. 소수의 고위 관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 고려 지배 체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5품 이상 관료의 자제들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음서 제도가 있었으나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였다.

 

지방 통제도 차츰 강화되었다. 983년 지방에 처음으로 12목을 설치하고 목사를 파견했다. 현종 때는 4도호, 8목, 56지군사, 28진장, 20현령을 두었다.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은 크게 경기와 양계, 5도로 구분되었다. 5도는 안찰사가 파견되었다. 실제 행정은 향리들이 맡았다. 향리는 그 지방의 유력자들이었다. 특수한 행정구역으로 향, 부곡, 소 가 있었다.

 

전시과와 수취

국가의 수취 대상은 양인 농민과 이들이 경작하는 토지였다. 전시과는 모든 관료에게 품계에 따라 토지를 분급하는 제도였다. 기본적으로는 세를 거둘 수 있는 권리인 수조권을 일시적으로 준 것으로 1/10조로 규정해 과도한 수탈을 막도록 했다. 전시과에는 지급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의 토지가 있었다. 왕실에게는 궁원전이, 문무 양반에게는 양반전이, 군인에게는 군인전, 각 관청에는 공해전이 지급되었다. 5품 이상의 고위 관료에게 양반전 외에 공음전이라는 토지도 주어졌다. 공음전은 예외적으로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토지로서 귀족 관료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장치가 되었다.(전시과는 원칙적으로 세습이 허용되지 않았다.) 고려 초에는 공신들에게 건국에 기여한 공로에 따라 역분전을 지급했다.

 

고려 시대의 신분

 

 

고려는 지방 호족의 의해 세워진 나라였다. 각 지방의 유력자들은 망족이라고 하며 자신의 가문을 자랑했다. 이들은 귀족이라는 의식과 권위를 내세웠고 11세기 이후에는 몇몇 유력 가문들이 문벌을 형성했다.  그래서 중앙의 고위 관직을 차지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고려의 관료는 문반과 무반으로 나뉘었다. 문반이 무반보다 더 중시되고 우대되었다. 고려 사회는 법적으로는 양인과 천인만 있었다. 귀족도 양인이었지만 귀족은 지배층으로서 경제력과 권력을 준 특권계층이 된 것이다.

 

양인 가운데 정호는 군인이나 역에 관련된 일을 하였고 지방 유력자들의 후손이었다. 백정은 일반 농민으로 조세와 역역이 부과되었다. 특별 행정 지역인 향, 소, 부곡 주민들은 일반 양인보다 천대 받고 많은 부담을 가졌다. 향과 부곡 주민들은 농사에 종사했고, 소의 주민은 금,은, 철, 자기, 먹 등 특정한 공납물품을 생산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그밖에 교통 요지인 역과 숙박 시설인 관, 강변 요지에 설치된 진의 주민들도 양인이지만 천시되었다. 가장 낮은 천인 계층은 노비였고 공노비와 사노비가 있었다.

 

고려 초의 국제 정세

요의 침략

 

993년 요의 장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고려는 강화 회담을 제의하고 서희는 강동 6주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둔다. 뒤에 송을 침략한 요는 먼저 고려를 침략한다.

 

강조의 정변

 

 

고려는 1009년 강조의 정변이 일어났다. 목종의 실권을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장악하고 왕위까지 넘보고 있었다. 강조는 목종까지 죽인 후 새임금으로 현종을 세우고 권력을 쥐었다. 1011년 초에 개경이 함락되었다. 그런 수난 끝에 요는 6차까지 침략했다. 그러나 강감찬을 필두로 귀주대첩에서 승리를 거두자 요는 침략 전쟁을 그만두고 고려와 화친을 맺었다.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고 송도 고려를 우대하여 고려의 국제적 지위는 더욱 높아졌다.

 

여진의 침략

 

동북쪽 변경을 위협하는 여진족을 윤관은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철수한 뒤 1104년 별무반을 편성하여 1107년 17만의 고려군은 여진 정벌에 나섰다. 물리치고 이겨냈지만 계속 쳐들어와 고려를 괴롭혔다. 역시 힘들게 물리친 후 뒤에 여진이 화친을 요구하자, 오랜 전쟁에 지친 고려도 동의하고 화친을 맺었다. 여진은 세력을 확대해 금이 되어 고려에게 사대를 요구하자 고려는 1126년 군신관계를 맺었다. 그 결과 금은 더는 침략하지 않았다.

 

대외 교역 및 교육 문화

 

고려는 활발한 대외 교역을 통해 서방 세계에 코리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고려에서 유학은 정치 이념과 지배 체제 정비의 바탕이 되었다. 광종은 과거제를 실시하고 , 유학의 소양을 가진 인재를 등용하였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책을 받아들여 통치 질서를 확립해 갔다. 과거제는 국정 운영의 바탕이 되었다. 과거는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을 시험하는 명경과, 시부와 책문으로 시험하는 제술과로 나뉘어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면 시험관인 지공거를 좌주라 하고 급제자를 문성이라 하엿고 부자 관계처럼 돈독해 후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학벌을 형성하기도.

 

과거 실시에 따라 교육에서도 경학과 문장이 중시되었다. 공적 교육감으로 국자감을 지방에는 향학을 두고 논어와 효경을 기본으로 교육하였다. 11세기 중엽에는 유학자 최충이 9재학당을 설립하고 생도들의 수준별로 9개 전문 과정으로 나누어 교육했다.

 

불교는 국교로 크게 숭상되었다. 풍수지리설은 신라말 선승 도선이 체계화한 것으로 새로운 인문지리적 인식을 보여주어 고려의 건국을 뒷받침했다. 이후 미래를 예언하는 도참설과 결부되어 묘청의 난과 같은 정치적 사건에 이용되었다.

 

 

고려초에는 각 지방에서 대규모 불상이나 석탑들이 조성되었다. 논산 관측사의 은진미륵, 파주 용미리의 미륵불, 안동 제비원의 석불 등이 대표적이다.

 

 

11세기에는 왕실이 주도한 국가적 불사로 개경에 현화사, 흥왕사 같은 대규모 사찰들이 건립되었다. 아울러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려는 기원에서 대장경 조판 사업도 이루어졌다. 70여년이 걸린 대규모 사업으로 1087년 완성되었다. 이것을 초조대장경이라고 한다.

 

불교 교단은 신라 말에 선종이 성행한 이후로 교종과 선종의 여러 파가 난립해 있었다. 불교 사상면에는 교와 선의 대립이 문제가 되었다.

실록을 편찬하기도 하여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뒤 100여년 간 평화가 지속되었다. 귀족들 사이에는 풍요로움과 안일함을 찬미하는 시문을 짓는 일이 성행했다. 관직을 독점하고 측근이나 외척이 되어 권력을 휘두르는 문벌 귀족이 나타났고 12세기에 이르러 귀족들의 권력다툼으로 인한 정변이 일어났다.

 

 

 이자겸 가문과 왕실

외척이 왕실을 장악하며 최고의 권세를 누리던 이자겸은 십팔자가 왕이 된다는 도참설을 퍼뜨리고 인종을 독살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딸인 왕비의 도움으로 인종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인종은 몰래 척준경을 회유하여 세력을 제거하며 왕권을 회복했지만 정치는 크게 어지러워졌다.

 

서경천도 운동

인종은 개경을 떠나 남경(지금의 서울)으로 행차하고 이듬해에는 서경(평양)에 행차했다. 그곳에서 정지상과 승려 묘청, 일관 백수한 등을 만났다. 묘청은 개경은 지덕이 쇠퇴했고 서경에 왕기가 있다며 서경 천도를 내세워 개경의 문벌귀족 세력을 무너뜨리려 했다. 당시는 김부식 형제의 경주 김씨, 정안 임씨 가문 등이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이들은 금의 요구에 따라 군신 관계를 맺고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서경파의 말에 따라 인종은 대화궁을 지었고 딸성당이라는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모두 풍수지리와 도참설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대화궁이 완공된 뒤로 근처에 벼락이 치는 등 이변이 일어났다. 그러자 인종은 더는 서경파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1138년 서경파는 군사를 일으켰다. 묘청은 나라 이름을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고 자신들이 하늘이 보낸 충의의 군대라고 내세웠다. 결국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고려는 귀족 중심 사회

 

고려는 문반 관료 중심의 귀족사회였다. 의종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과 가까운 환관과 문반 관료들을 개인적으로 우대하였다. 전쟁이 없자 무신들은 문신들의 호위병 노릇을 하고 칼춤이나 수박까지 보여주는 수모를 당했다. 궁궐 밖 행차가 잦았던 의종을 1170년 가을, 보현원으로 행차를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 무신들이 호위하고 갔다. 그들은 문신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의종을 쫓아내고 동생 왕(명종)을 앉혔다.

 

최충헌, 최우의 집권

 

권력을 잡은 최충헌은 봉사 10조를 왕에게 올리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했다. 동생 최충수가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고 하자 동생도 죽였다. 왕도 갈아치워 명종을 쫓아내고 신종을 왕으로 세웠다. 1인 독재 체제를 구축한 최충헌은 사병 집단인 도방을 강화하여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다. 이어서 그의 아들 최이가 권력을 잡고 재산을 늘리고 사병을 강화하고 삼별초라는 호위부대도 조직하였다.

 

1230년 몽골군이 침략해오자 최우는 항전의 뜻을 밝히고 강화 천도를 강행했다. 항전을 표방한 최씨의 집권은 최항, 최의까지 4대 60여년간 지속되었다.

 

농민, 천민의 봉기

 

문벌 귀족들의 다툼에 이어 무신집권으로 지배체제가 흔들리고 농민 천민의 봉기가 일어났다. 1172년 창주, 월주 등지의 지방 수령과 토호들을 죽이고 봉기를 일으켰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이 무신 집권에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키자 곧 서북지역 40여 성의 농민들이 가담하여 농민 봉기로 확대되었다. 광수가 이끄는 농민군은 서경을 차지하는데 이들은 묘향산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황해도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봉기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176년에는 공주 명학소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망이와 망소이의 지휘로 공주를 장악하고 급속히 세력을 넓혀갔다. 1178년 명학 소민들은 다시 일어났고 1182년에 전주에서는 관노와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1193년 경상도에서 김사미와 효심이 이끄는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1202년 경주에서 신라 부흥을 외치는 봉기가 일어났다. 또 백제 부흥을 외치는 봉기도 전라도 담양 중심으로 일어났다. 중앙 정부에 대항하는 지방민의 봉기는 지역감정과 역사 의식을 표방하며 더욱 확대되었다. 최충헌의 집권 직후 그의 종인 만적도 봉기할 계획을 세웠으나 붙잡혀 예성강에 던져졌다. 13세기에 들어서도 봉기는 계속 일어났다. 그러나 몽골군이 침략해오자 농민과 천민들은 생존을 위해 몽골군과 싸워야 했다.

  

 

몽골의 침략

 

고려는 13세기에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몽골이 일어나 대제국을 이룩하였고 1219년 고려군과 몽골군은 거란군을 소탕하였다. 이를 계기로 형제의 맹약을 맺었으나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변에서 피살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몽골은 고려의 소행이라 단정하고 국교를 끊었다. 1231년 8월 몽골군이 고려를 침략해왔다.

 

강화 천도와 항전

 

최의는 항전을 결의하고 1232년 7월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몽골은 1235년 다시 고려를 침략했다. 강화도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던 최우와 귀족들은 불교 신앙으로 몽골군을 물리치려는 기원에서 다시 대장경 판각 사업을 벌였다.

 

고려와 원의 강화

 

 

 

1238년 고려는 사신을 보내 강화를 제의하고 철군을 요청했다. 이후로 내분으로 소강 상태가 지속되다가 다시 몽골은 침략해왔다. 강화도까지 침략당할 위기가 닥쳤지만 최의는 완강하게 항전을 고집했다. 1258년 김준과 임연 등이 정변을 일으켜 최의를 살해하여 최씨 정권은 무너졌다. 1259년 몽골과 다시 교섭이 시작되었다. 몽골은 개경으로 환도하고 태자가 입조하라는 조건을 내놓았다. 그러나 도중에 고종이 죽고 몽골 황제도 사망했다. 이에 원종은(태자)결단을 내려 중국 개봉 근처에서 쿠빌라이를 만났다. 당 태종도 굴복시키지 못한 나라의 태자가 스스로 왔다고 기뻐하며 고려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강화로 돌아온 원종은 1268년 임연을 이용해 김준을 제거했다. 원종은 몽골의 도움으로 4개월 만에 복위했다.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혼인을 맺을 것을 간청했다. 이후로 고려 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고려에 돌아온 원종은 1270년 6월 개경으로 환도했다. 이때 삼별초 해산령을 내리자 삼별초는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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