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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인문학)/모든것의 역사

고조선과 부여, 삼한의 역사

by roo9 2020. 12. 17.

고조선은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나타난 고대 국가이다. 단군 신화는 청동기 시대 농경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곰과 범을 토템으로 하는 집단이 혼인 관계를 맺어 연합하였고 조선이라는 국가가 성립되었다.

 

단군왕검의 나라 고조선

 

 

 

 

단군왕검은 제정일치의 군장으로서 신성시되었다. 단군왕검은 1500년이나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는데 1392 건국된 조선과 구별하여 고조선이라 부르고 있다. 고조선은 대략 기원전 10세기 이후에 청동기 문화를 발전시킨 집단이 고대국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비파형동검과 고인돌, 미송리형 토기 등은 고조선의 대표적 유물이다. 고조선은 점차 세력을 확대하면서 요동에서 요서와 한반도 서북부지역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고조선 왕은 중앙에는 박사와 대부 같은 관리들이 있어 정치를 담당했다.

 

 

고조선 도망

 

기원전 5~4세기 무렵 중국의 혼란기에 유이민들이 몰려왔고 이때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4세기 후반에는 중국 연과 대립하였고 3세기 초에 연이 고조선을 침략하였다. 고조선은 세력을 잃고 중심시를 한반도 서북부 지역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 청동기는 세형동검문화로 발전했다.

 

위만의 고조선

 

 

 

기원전 221 중국이 한으로 통일하면서 한의 위만이 요동의 고조선으로 피신하였고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에게 서쪽 변경지대를 다스리게 하였으나 기원전 194 한이 침입하자 위만은 방어를 구실로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지. 위만은 조선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위만 조선이라 불렀다. 위만은 이주민들도 포섭하면서 나라 전체의 일은 상과 장군들이 모인 귀족회의에서 결정하였다. 또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중계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차지했다. 중국 이주민들에게 받은 철기도 접수하면서 강성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고조선의 지배체계

 

 

 

고조선은 차츰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의 지배 체제를 정비해갔다. 기원전 4세기 말에는 국가 기구와 관료 제도를 갖추고 상당한 군사력도 보유하였다. 기원전 2세기에는 박사, 비왕, , , 대신, 장군 등의 관직이 있었다. 범금 8조도 만들어 공권력으로 법을 집행하기도 하였다. 법조항은 사유재산과 형벌, 노비가 있었음을 있는 내용들이다. 사유재산과 노예 주인의 소유권을 보장하고 있다. 주인과 노예는 예부터 뗄레야 없는 관계인 .

 

고조선의 지배층은 귀족으로 많은 토지를 소유하며 노비를 부리며 생활하였고 기본적인 생산 담당은 촌락의 일반 평민인 하호가 맡았다. 이들은 노예나 비슷한 처지였다고....

 

고조선의 멸망

 

 

강성한 고조선은 기원전 2세기에 한과 대립하였고 한은 북방의 흉노족과 계속 전쟁중이었다. 무제는 동방에서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고조선과 흉노의 관계를 끊으려 하였다. 회유하다 고조선을 침략하였고 처음에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 다시 시도하여 수도 왕검성을 포위하였다.  1년을 넘게 버텼지만 끝내 왕검성이 무너지고 기원전 108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고조선이 망한뒤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라는 4개의 군을 설치했다. 밑에 현을 두고 태수와 현령을 보내 지배하였다. 이것을 한군현 또는 한사군이라 한다. 주민들은 읍락 단위로 한의 군현에 예속되었다. 한사군 통치는 대동강변에 자리잡은 낙랑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런 사이 사회는 복잡해지고 8 범금은 60여조로 늘어났다. 그리고 한군현의 지배는 토착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느슨한 통치를 하였고 2세기 말부터 낙랑의 세력은 줄어들고 313 고구려에 통합되었다. 한군현의 통치에 대한 저항은 토착 주민 집단의 결합과 정치력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주민들은 결집하여 고구려와 삼한으로 발전해갔다.

 

 

 고조선의 뒤를 이어 부여의 등장

 

 

부여는 중국 길림 지역을 중심으로 송화강 유역에서 일어났다. 일찍부터 그곳은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여 서단산 문화라고 불리기도 한다.

부여가 자리잡은 만주평원은 농경과 목축에 유리한 여건으로 물산이 풍부하여 살기가 좋았다. 부여는 밑에 마가 우가 저가 구가라는 대가들이 연합한 형태로 국정을 운영했다.  대가들은 사출도라는 지배 영역을 기반으로 정치를 하였다. 이들은 아주 막강한 힘을 가졌다. 부여는 중국 여러 왕조들과 활발한 교류 덕분에 중국 역사서에 부여는 예의를 아는 나라로 전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부여는 서쪽 유목 집단이나 남쪽 구구려와는 적대 관계로 갈등을 빚었따. 285 선비족의 침략으로 부여의 수도가 함락되고 부여는 쇠퇴하다 4세기 중엽 전연 군대의 급습으로 멸망하였다. 일부 지배층은 두만강 유역으로 달아나 동부여로 터를 이루며 살았지만 410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투항했다.

 

 

 

진국과 삼한

 

 

진국은 고조선 남쪽에 있었다. 알려진 바는 없고 뒤로 삼한이 나타난다. 기원전 2세기 위만에게 쫓긴 고조선의 준왕이 건너 한으로 가서 왕을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준왕 세력은 전라북도 익산 일대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 세력을 확대하다 진국 세력을 포섭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은 철기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여서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면서 생산력을 높였다. 3세기 소국들이 연합을 하였고 소국의 지배자들은 신지. 읍차 등으로 불렸다. 삼한은 낙랑군, 대방군 등과 활발히 교류하며 성장하였다. 삼한 단계에서 한반도 전역이 본격적 철기 문화 단계로 진입하였는데 철기문화의 확산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사회를 출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마한은 백제에 통합되었고 진한은 사로국에 통합되었다.  변한은 소국이 국가 형태를 유지한 구야국을 중심으로 연맹체를 이루며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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