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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인문학)/모든것의 역사

고구려의 역사

by roo9 2020. 12. 18.

고구려의 건국 설화는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이 압록강 중류 유역의 졸본에 나라를 세운 것으로 시작한다.  이곳은 따뜻하고 강수량이 풍부한 지역으로 맥족이 살고 있었다. 또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러나 산간지대고 땅이 척박하여 식량이 모자라 고구려는 일찍부터  전쟁을 벌여 세력을 확장하는데 힘쓸 밖에 없었다.

 

고구려의 기원

 

고구려라는 명칭은 현도군에 속한 가운데 고구려현이 있다는 것에서 처음 나타났다. 고구려가 자리잡은 지역은 청동기 시대의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기원전 4~3세기 무렵부터 철기 사용이 확산되면서 농업 생산과 인구가 증가하였다. 가운데 유력한 집단을 중심으로 지역 정치 집단이 각지에 형성되었다.  이를 ''라고 하였다.

 

나는 연합하여 연맹체를 이루었는데 소노부 집단이 우세하여 연맹체를 이끌었다. 부여에서 이주 주몽의 무리가 계루부를 이루며 점차 연맹체의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계루부의 통제 아래 집단은 5부로 정리되었다.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고구려는 계루부를 중심으로 5 연맹체가 지배하는 체제를 이루었으므로 흔히 5 체제라 한다.

 

활발한 정복전쟁을 한 고구려

 

 

 

고구려는 정복전쟁을 활발이 벌이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점차 중앙정부의 통치를 강화했다. 1세기 후반 태조왕 고대국가 체제를 확립했다.

태조왕은 기존 해씨 성을 고씨라 칭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2세기말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국상으로 삼아 권력을 강화하면서 진대법을 시행했다.

 

 

 

 

진대법-춘궁기에 나라의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하는 제도를 마련했고 왕비는 절노부에서 맞아들여 왕비족과 연합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산상왕 때는 왕위 계승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꾸었다.

 

 

 

고구려는 3세기 중엽에 요동 진출을 꾀하였다. 하지만 위가 요동 지역을 평정하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동천왕은 옥저 땅으로 피신하고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었다. 위기 끝에 259 다시 침략해 위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다시 국력을 재정비하고 주변국을 점령하면서 요동 진출을 꾀하였지만 중국의 5 16 시대에 선비족 전연이 먼저 쳐들어왔다. 수도 국내성이 무저지고 어쩔 없이 고구려는 전연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370 전진이 전연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고 전진은 고구려와 우호 관계를 맺고 372년에는 사신과 승려를 보내 불상과 불경을 전해주었다. 

 

신라와 우호 관계 백제와는 대결한 고구려

 

 

 

 

이후 40년간 요동 지역이 평화로운 시기에 고구려는 신라와는 우호 관계를 맺고 백제와는 치열하게 대결하였다. 백제 근초고왕은 한반도 남부 지역을 차지하고 가야 왜와 관계를 돈독히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평양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고국원왕이 전사했다. 위기를 맞은 고구려는 통치체제를 정비하였고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관직 체계를 확립해갔다. , 교육 기관인 태학을 설립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지배사상도 강화했다. 체제 정비 고구려는 삼국 전쟁에서 주도권을 쥐며 강성한 나라로 동북 아시아 일대에 세력을 떨쳤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한반도 남부 지역을 차지하고 가야 왜와 관계를 돈독히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평양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고국원왕이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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