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뱀을 상징하는 을사년의 오행으로 을목은 음의 성질을 갖는 목에 해당합니다. 유연하고 섬세하며 조화를 중시하는 성향으로 분류되며 지지의 사화는 음의 속성을 지닌 화의 기운입니다. 지지 사화는 뱀을 상징하며 지혜롭고 신중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을사년에는 굵직학 세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을사사화, 을사조약 그리고 한일 기본조약이 해당합니다.
1545년 을사사화
1545년에는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해입니다. 또한, 을사사화는 조선 중종에서 명종 시대에 발생한 사화입니다. 을사사화는 주로 조선 시대 정치사의 큰 분열과 갈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조선 11대 왕 중종의 사망 이후 왕권 계승 과정에서 벌어진 정치적 학살로 권력 투쟁과 붕당 간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보다 자세한 사건 배경을 보면, 1545년 중종 왕이 사망 후 그의 아들 인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인종도 재위 8개월 만에 병사를 하자 그의 이복동생인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게다가 명종이 나이가 어리다 보니 문정왕후가 섭정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문정왕후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반대 세력을 제거 시도를 합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정치판이 붕당의 갈등이 생기고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심화됩니다. 여기서 훈구파는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권력을 유지한 공신 중심의 세력이고 사림파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지방에서 성장한 학문적 엘리트 계층을 의미합니다.
윤 씨 가문의 권력 투쟁
문정왕후의 섭정하에 문정왕후 가문인 윤원형과 윤임이 대립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윤원형 중심의 세력으로 명종의 즉위를 지지한 소윤으로 분류되고 윤임 중심의 세력으로 인종의 계승을 지지한 대윤이 해당합니다. 여기서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명종의 정권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대륜 세력을 제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윤임과 그의 지지자들은 반역 혐의로 몰려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긴 사화가 바로 을사사화이며 이로 대윤 세력이 대거 숙청되자 사림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당연히 훈구파와 소윤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문정왕후는 을사사화를 통해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거하며 권력을 공고히 하였지만 이로 인해 정치적 혼란과 분열의 씨앗이 남게 됩니다.
조선시대 을사사화를 보면 현대 정치사와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습니다. 조선의 권력 구조와 붕당 정치가 본격적으로 대립하면서 사림파의 이상주의적 정치와 훈구파의 실용주의적 정치가 충돌하게 된 가운데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역사는 계속 이런 식의 대립을 하며 지낸 것 같기도 합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불린 을사조약
을사사화 이후 360년 만에 돌아온 을사년은 1905년 대한제국 고종 42년에 해당합니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고, 대한제국을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조약이 체결됩니다.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를 앞세워 강압적인 방법으로 조약을 체결한 것인데요 이로 인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상실되고 이후 대한제국은 완전히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5년 후 경술국치로 이어졌으며 이 조약으로 인해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 사건입니다. 또한, 이 조약으로 인해 수많은 의식 있는 사람들이 반발하여 의병을 조직하였고 민영환, 조병세 등은 항의하며 자결까지 하였습니다.
1965년 한일 기본 조약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대한민국은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을 맺게 됩니다. 대한민국과 일ㅇ본이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해 체결한 조약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외교적 전환점으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이 조약은 또한, 한국과 일본 간의 역사적 외교적 갈등의 기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조약으로 일본은 한국에 무상 3억 달러와 유상 2억 달러의 경제 지원을 제공하며 경제적 지원을 받았고 이 조약으로 국교 정상화를 통해 외교적 입지를 강화한 측면이 있지만 여전히 식민 지배에 대한 잔재가 청산되지 못한 후유증으로 한국 사회는 현재까지도 반대하고 반발하는 여론이 강했습니다. 훗날 위안부 문제, 강제 징용 등의 미해결 문제도 남아 있게 되었고요. 물론 경제 성장하는 데 발판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과거사 청산의 부재 등의 여파가 아직도 남은 것이 아쉬운 점으로 남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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