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잉그리드 버그만이 유럽의 지성이라면, 미국의 자존심은 단연 캐서린 헵번이다. 네 번의 아카데미 수상, 매니시 룩의 아이콘, 괴팍하고 당당한 개성파 배우. 미국 영화사의 한 장을 장식한 그녀의 삶은 그 자체로 드라마였다.
1. 자유와 지성의 가정에서 태어난 캐서린
1907년 5월 12일, 코네티컷주 하트포드에서 태어난 캐서린 헵번은 지성과 자유를 중시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이자 박사, 아버지는 성병 예방을 대중에게 알린 의사였다. 그러나 완벽해 보였던 가정은 그녀의 오빠가 자살하면서 균열이 생겼다. 캐서린은 이 사건 이후로 내면에 깊은 불안을 품고 자라났으며, 이는 그녀의 성격과 연기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 무대에서 스크린으로: 연극에서 시작된 영화배우의 꿈
필라델피아 근교의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며 연극에 빠져든 그녀는 졸업 후 연기자로서 커리어를 쌓아간다.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당당한 외모의 그녀는 1930년대 RKO와 계약을 맺으며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입성했다. 모닝 글로리로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후, 작은 아씨들의 조 역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헵번은 키가 크고 지적인 이미지로, 미국이 사랑한 ‘강한 여성’의 상징이 된다.
3. 당당함의 대가: 캐서린 헵번이라는 논쟁적 존재
그녀는 늘 당당했다. 바지를 입고 골프와 테니스를 즐기며, 화장기를 지운 얼굴로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로 인해 대중과 언론은 종종 그녀를 ‘괴팍한 인물’, ‘레즈비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의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모든 규칙을 지키면 모든 재미는 없어진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었다. 그런 태도는 일부 팬들에게는 찬탄을, 일부 스튜디오에게는 두려움을 주었다.
4. 사랑과 연기: 스펜서 트레이시와의 27년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찬란했던 관계는 스펜서 트레이시와의 만남이었다. 9편의 영화를 함께 찍으며 연인 관계로 발전했지만, 트레이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이혼하지 않은 채 별거 중이었다. 그들은 27년간 언론에 노출되지 않은 채 은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헵번은 트레이시가 죽던 날, 그의 아내와 자녀가 곧 올 것을 알고 조용히 자리를 떴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이틀 후 조용히 조의를 표했다. 이것이 바로 그녀다.
5. 시대를 초월한 독보적 배우
헵번은 평생 언론을 피했고, 명성과 돈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녀는 연기를 위해 살았고, 연기로 기억되고자 했다. 트레이시가 떠난 후에도 그녀는 독립적인 삶을 이어갔으며, 자서전 Me: Stories of My Life를 출간해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2003년 6월 29일, 96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이 시대의 마지막 고전 배우였던 그녀는,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으로 살아간 배우였다.
마무리: 캐서린 헵번, 여성의 가능성을 다시 쓴 이름
캐서린 헵번은 단순히 영화 속 캐릭터를 연기한 여배우가 아니다. 그녀는 삶 자체가 하나의 ‘페르소나’였고, 시대의 관습과 한계를 깨는 존재였다. 그녀의 매니시 룩, 직설적인 화법, 사랑과 고독, 영광과 고립이 어우러진 인생은 우리에게 지금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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