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umanities(인문학)/모든것의 역사

영국 패션의 모든 것

by roo9 2021. 7. 10.

산업 혁명 이전 영국의 패션 스타일은 린넨 셔츠에 조끼, 그리고 무릎 길이의 코트를 입는 것이 보편적 스타일이었다. 물론 무릎 길이의 반바지와 트리콘 모자 및 가발로 멋을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여성 패션은 좀 더 가학적이었는데 코르셋과 페티코드를 속옷으로 입고 예쁘게 수놓은 드레스를 입었다.

 

영국 패션 스토리

 

 

요즘처럼 패스트 패션이 발달한 시기가 아니었기에 옷은 한번 만들면 오래 입을 수 있게 정교하고 튼튼하게 만들어 입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최고의 모직으로 말이다. 디자인이나 장식도 나름 중요했겠지만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질감이었다.

 

 

 

그리고 18세기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패션은 다소 질감 위주보다 실용성을 중시하게 된다. 점차 거추장스러운 가발도 벗어던지게 되었고.
또한, 기계로 움직이는 세상이 되자 대량 생산이 가능한 옷감에 색을 입히는 염료가 발달한다. 특히 연자주색이나 보라색은 멋쟁이들의 필수 컬러였다.

 

영국 부유층 의상 스타일

 

 

반면 부유한 계층의 남성들은 검정 정장을 즐겨 입었다. 지금은 멋의 상징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공장 매연으로 인해 옷에 얼룩이 묻는 것을 커버하기 위해 검정을 택한 거다.

 

 

 

 

기성복이 출현하고 사람들의 옷이 다양하고 편해진 후 19세기 말 무렵에는 패션 역사에서 중요한 발명품이 출현한다. 바로 가정용 미싱기의 대중화였다. 이제 여성들의 필수 덕목은 손바느질이 아닌 재봉틀의 사용으로 각종 잡지를 통해 새로운 디자인을 배우고 금손을 과시했다. 

 

무역이 발달하면서 각국의 새로운 염료와 재료들로 옷을 만들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영국 패션은 그 어느때보다 활기를 띤다. 개인의 금손 뽐내기는 옛 빅토리아 시대 감성을 끌어올리며 벨에포크 시대를 맞이했지만 1차 세계 대전 이후 다시 절제된 패션으로 회항한다.

 

 

경제적 제약과 함께 여성들이 일터로 나가게 되면서 여성복은 단순화되고 일하기 편한 복장으로 대체되었다. 거기에 군복에서 착안한 실용적인 군복 스타일 의상이 근로자들의 유니폼이 되었고 이러한 유니폼은 조직을 더 단단한 연대감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시기에 프랑스의 코코 샤넬이 착안한 의상 스타일이 대유행하면서 여성의복은 맵시있고 편한 의상을 선호하게 된다. 

 

 

 

 

정확하게는 1914년 무렵 여성과 남성의 패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특히 여성복은 남성복을 차용하면서 비슷한 스타일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아르데코 스타일

 

 

 

전쟁 영국은 황금기를 맞이한다. 1920년대는 아르 데코 스타일로 정의되는 기하학적 선과 황금 빛 컬러로 건축과 패션을 찬란하게 물들였다. 물론 이러한 스타일의 모티브는 그리스와 로마를 비롯한 고대 문명에서 차용한 스타일이다. 그래서 아르데코 스타일은 태양의 신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빗살무늬를 특징으로 한다. 물론 눈썰미있는 크리에이터들이 이러한 스타일을 차용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1922년 투탕카멘 무덤이 발견된 이후 고대 이집트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이러한 관심이 문화 예술 전반계에 영향을 미친 거다. 그의 영향으로 현재 영국을 대표하는 헤롯 백화점이 탄생한 거다. 

 

 

 


전쟁이 끝나고 여성들은 그 시대의 군복 스타일은 제거했지만 실용성은 가져왔다. 여성들은 화려하면서 소매없는 스타일의 프린지 드레스에 긴 장갑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반면 남자들은 산업혁명 시대부터 줄곧 고수한 기본 정장에 넥타이를 유지했다. 다만 색상이 조금 다채로워졌을 뿐.

 

그러나 패션과 경제는 언제나 같은 곡선을 달리듯 황금기는 곧장 막을 내렸다. 미국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대공황은 영국 또한 만만치 않았다. 영국 실업률은 두 배로 증가하며 수출길이 막혔다. 당연히 의류 소비에도 검소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 만들고 수선하면서 알뜰 모드로 임했다.

 

배급제를 시행하는 영국

 

그리고 2 세계 대전이 닥치고 영국은 사회주의 체제 모드로 돌입한 것처럼 배급제를 시행한다. 정부 쿠폰을 이용한다거나 모아둔 쿠폰의 양에 따라 1년에 한 벌 씩 의류 구입에 사용해야 했기에 쿠폰 가치는 코트 가치와 비례하게 된다. 따라서 당시 코트는 당대 가장 비쌀 수밖에 없었다.

 

 

 

1942 영국 정부는 제한된 양의 품질 관리 직물을 사용하는 의류 유틸리티 제도를 도입한다. 나름 정부가 의복 재료를 통제하면서 배려를 했는데 주머니나 단추 등에 명품적 요소를 배제하여 사람들이 비슷한 수준의 옷을 입게 하는 데 노력했다. 그래서 모든 품목이 경제적 제약의 범위 내에서 가능한 최신 유행처럼 보이는 옷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던 와중 레이온같은 신소재가 나오면서 디자이너들이 의상을 밝고 가볍고 재치있는 스타일로 변형해서 성공한다. 물론 신소재 홍보를 위해 광고 효과가 가장 컸긴 했다. 영국은 그와중에 스타킹 표준 길이를 줄이는 통해 사람들 원성이 장난이 아니었다고.

 

전쟁 후 안정이 필요했던 영국인

 

전쟁은 1945년에 끝났지만 배급제는 1954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입는 옷은 여전히 제약이 많았다. 미니멀리즘이 달래 유행한 게 아니었다. 원피스는 곧고 심플한 실루엣을 유지했고 남성들도 한결같이 수트핏.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온 영국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안정이었다. 그래서 안정감을 주는 통일성이 의상에도 고스란히 반영된 것. 전쟁 후 영국은 패션 강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프랑스 디자인을 모방하여 더 싸게 생산하여 팔며 패션 소매업의 시작을 알렸다. 

 

 

전쟁을 모르고 자란 자식 세대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들의 부모는 자식들이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급스럽고 질 좋은 의상을 만들어 입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로 영국의 신세대 디자이너들은 틀딱들의 계급에 따라 나뉘던 패션 스타일을 연령대로 선을 긋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이 든 사람들은 입지 못하게 할 작정인지 감히 입을 엄두를 못 내는 것인지, 스키니 핏과 미니 스커트 PVC등 과감한 소재와 디자인으로 차별을 꾀했다. 노인 접근 금지나 마찬가지의 혁명적 패션이었다. 

 

백화점에서 우아하게 쇼핑하면서 고르는 스타일이 아닌 상점에서 다채롭게 진열하고 시끄러운 팝 음악을 틀어 의상을 골라 입게 하였다. 그런 보세샵 풍경이 국내에도 낯설었던 건 아니다. 여전히 진행중인 곳도 있고.


그러니까 영국이 패션으로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특정 디자이너의 작품이나 스타일이 아닌 문화를 전파한 거다. 음악과 문화 그리고 젊은 층만 전유할 있는 스타일을 유행시켰다. 놀랍지도 않은 사실이긴 하지만.

 

 

 


어쨌든 영국 스타일은 명품 브랜드가 아니어도 영국 패션을 최강자로 올려 놓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영국의 혁신에 프랑스 디자이너들이 방관하고 있을 턱이 없었다. 프랑스 디자이너들은 영국의 자유로운 문화 양식의 뿌리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사랑 중심 히피 운동에서 차용했다는 비밀 레시피를 알아버였다. 이후 우후죽순 영국 부티크 시장은 문을 닫아야 했다. 영국이 남긴 건 1960년대 영국 패션이 전세계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의 보고가 되었을 뿐 패션의 중심 도시로 남지는 못했다. 대신 음악을 많이 남기긴 했다. 

 

영국 뮤지션 패션과 영국 왕실 패션

 

 

그러나 영국 팝이 히트칠수록 영국 패션은 뮤지스트의 스타일을 따라 고스란히 유행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70년대 중반의 펑크, 80년대 데이빗 보위 등 패션의 리더들은 얼마든지 활약했기에 영국은 패션의 원천이라는 자부심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영국 왕실 패션은 전세계 여성들이 선망하지만 쉽게 따라하지는 못한 노블함의 진수였다. 

 

 

그러나 영국 패션은 대체로 하류 패션 주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이애나의 프린세스 룩 말고는 펑키함, 스모키, 스키니로 대변하는 영국 패션 문화는 독특하지만 독창적이거나 명품이미지는 아니니까 말이다. 물론 영국에도 역사가 오래 된 명품 브랜드는 있다. 영국하면 버버리. 또, 버버리 밖에는 딱히…. 폴 스미스나 비비안 웨스트 우드도 90년대 잘 나간 브랜드이지 역사는 짧으니까.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