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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인문학)/모든것의 역사

한국사 고대의 종교 문화 불교에 관하여

by roo9 2021. 8. 16.

고대문화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종교는 불교이다. 우리나라 불교는 4세기 무렵 고구려가 제일 먼저 수용했다. 372 소수림왕 북중국의 전진에서 순도라는 승려가 고구려에 와서 불경과 불상 등을 전해줬다. 백제는 384 침류왕 남조국 동진 승녀 마라난타가 불교 전해줬다신라는 4~5세기 고구려 승려이던 묵호자가 신라로 가서 불교를 전했다이 시기에는 국가적 공인을 받은 아니라 민간에 비밀리에 100 정도 전해졌고 527 법흥왕때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지배층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 고대 종교 불교 이차돈 순교 이후

 

 

이차돈 순교가 의미하는 것은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토착 귀족들과 이것을 수용하려는 왕실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불교가 수용되기 이전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지배자는 자신들을 하늘의 자손이라 떠벌리고 다녔다. 고구려 초기 신앙은 아빠가 북부 해모수며 엄마는 물의 화백의 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자기네가 천손이라 하였다. 또한 신라는 왕이 신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그러다 점점 인간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믿자 백성들도 만큼 진화된 이데올로기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종교를 수용하게 된다.

 

불교 사상의 특징

 

불교는 인도에서 사막길을 따라 서역길을 따라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종교다. 단순히 종교적으로만 들어온 것이 아닌 선진문화가 거쳐와 우리 문화를 업그레이드 시켰다.  불교 종파는 인도에서 수십개로 분파되었는데 고구려에서 유행한 불교 종파는 삼론종이었다.

 

불교에서 석가모니는 신이 아닌 깨달은 자를 의미한다. 석가모니는 인간이 고행에서 해탈할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불교의 역할은 사회 윤리국가 정신 확립에 기여(세속5)한 점이다. 또한  왕권강화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기에 왕실에서 먼저 수용한 이유다. 또한 나름 선진문화 수용을 의미하기도 한다. 왕족은 자신들이 천손이라고 했다가 왕즉불사상 즉 왕이 곧 부처다, 라고 전환했을 뿐이다.

 

왕이 곧 부처다

 

 

 

왕은 부처고 왕실은 석가족이라고 해서 진종이라고 하였다. 신라는 현신한 부처인 왕과 그 신하가 다스리는 불국토의 이상세계로 규정하였다. 이로 인해 왕실의 권위를 높여주고 나라에 충성하는 종교가 바로 불교가 된다. 신라는 가장 늦게 수용했지만 가장 독실하게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가 되었다. 6명의 왕이 불교식 왕명 사용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신라 불교의 업설

 

 

 

한편 백제는 율종또는 계율종이 유행했다. 율종과 계율종은 같은 말이다. 성왕 겸익이란 승려가 대표적이다. 신라불교는 업설 즉 왕과 귀족 지배를 정당화하는 업설과 미륵신앙을 추구했다. 업설이란 =시그마전생의 나의 행위를 의미한다. 업설은 당시 신라의 귀족 지배 모순 많은 골품제도를 정당화 시키는 역할을 했기에 상당히 강조되었다.

 

미륵신앙에 관하여

 

 

미륵은 미래불을 의미한다. 도솔천에서 미래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하기로 예약되어 있는 미래불이 미륵이다. 6~7세기는 미륵의 하생을 염원하는 사상이 널리 유행했다. 미륵 신앙은 화랑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화랑도의 리더인 화랑(용모 준수 진골 귀족) 하생한 미륵으로 여겨졌다화랑도 자체가 미륵을 따르는 무리라고 당시에 인식했다.

 

삼국의 불교 인식 특징

삼국시대 불교는 나라를 지키는 불교인 호국 불교 사상이 강했다.  백제의 왕흥사익산 미륵사 등은 호국사찰의 성격을 강하게 보여준다.

호국불교하면 나오는게 팔관회팔관회하면 혜량(고구려에서 신라로 귀화)이다.  혜량은 신라를 위해 전사로 싸우다 전사한 용사를 위해 제를 지내며 만든게 팔관회다. 백고좌회는 나라가 국란을 당해서 위기에 처할 백명의 유명한 고승이다. 백명의 유명한 대덕을 모셔다 인왕경을 설법하는 불교행사를 백고좌회라고 한다

 

인왕경은 인도에서 전해 왜적을 물리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불교 경전이다인왕경백고좌회는 호국불교 성격을 지닌다. 황룡사 9 목탑은 선덕여왕 삼국통일을 염원하면서 지은 것이다. 어느 자장법사가 선덕여왕에게 건의를 하였고 황룡사에 9 목탑을 건립하면 삼한일통을 이룰 있을 것이다 해서 백제의 건축가 아비지를 모셔다 거대한 탑을 쌓았다건립 배경은 삼국통일 염원 자체로 호국불교이다. 물론 지금은 터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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