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경제구조는 지배계급(왕, 귀족)이 양인 농민과 노비를 지배하여 그들이 생산한 생산물과 노동력을 수취하여 경제 생활을 영위하는 구조, 수취대상(토지, 사람) 그러나 한국의 고대사는 사료가 거의 없음. 삼국의 수취 제도 뿐.
한국 고대의 수취제도
조세: 재산의 정도에 따라 호를 상중하로 나눠 곡식과 옷감을 거뒀다. 삼국시대는 (역)15세 이상의 남자 노동력을 징발해서 성곽을 수리했다고 기록. 귀족생활은 사유지와 녹읍, 식읍, 노비 소유 , 화려한 생활 영위.
삼국은 귀족이 지배층. 귀족의 경제기반은 넓은 사유지. 녹읍과 식읍, 노비를 거느리며 화려한 생활 영위함. 녹읍과 식읍은 사촌지간. 삼한일통의 영웅 김유신에게 문무왕이 식읍 500호를 내줬다는 기록. 문무왕 동생 김인문에게 식읍 300호. 식읍은 왕족이나 공신에게 내려줌. 녹읍은 귀족 관료에게 내려준다. 녹읍과 식읍은 지급 대상이 녹읍은 귀족 관료, 식읍은 왕족 공신. 김유신 집에 노비가 3천명이었다 함.
삼국시대 각 산업 분야 특징
농업기술은사서에 기록된 농업기술, 삼국시대는 철제 농기구가 널리 보급됨. 신라의 경우는 6세기 지증왕 때 우경이 시작되고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대됨. 노동력을 보호하기 위해 왕이 죽으면 순장을 금지하는 조치가 생김. 그럼에도 농업 기술의 한계는 거름 주는 십이법이 발달하지 못함. 일년 농사하고 일년 또는 수년을 쉰 뒤에 다시 농사를 지었다는 점.휴한 농법. 수공업은 관영 수공업(솜씨 좋은 노비들이 무기나 장신구 생산), 당시 피지배층은 필요한 물품을 대충 지들이 만들어 씀. 상업은 시장(동시)설치. 소지왕 때 경주에 시장이 개설됨. 490년 소지왕 때 경주에 시장에 개설되었다. 이것을 정비해서 지증왕 때 동시라고 하고 동시전을 만들었다는 것. 대외무역은 고구려는 남북조 및 북방 유목 민족과 교류. 백제는 남중국 및 왜와 교류 신라는 6세기 이후 중국과 직교역(당항성)-신라는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 중국과 교역을 했었음. 6세기 중엽 진흥왕 때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하면서 당항성(경기도 화성)을 통해서 중원 왕조와 신라는 직접 교류하게 됨.
삼국의 사회
초기 읍락 사회
대가-가나 대가가 족장
호민-읍락의 상층부, 부유한 자
하호-대다수 생산 담당자.
천민이나 피정복민이 따로 있던 듯.
당시는 대가들이 호민을 통해 읍락을 지배하는 구조.
대가나 호민들의 본업은 전쟁, 약탈품 쌓아 두는 곳 부경.
ad 3~4세기 무렵은 중앙집권국가 출현. 신분제도 만들어짐.
고대 사회는 귀족이 정치 권력이나 사회적 특권 독점. 고대 사회의 귀족은 폐쇄적 혈통, 초기 고구려 지배 계급이 귀족층으로 편입이 되었을 것.
고구려의 경우는 고추가(왕과 왕비족의 대가) 등. 고추가는 왕족이던 계루부의 군장, 소노부나 절로부의 군장 들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호칭. 신라의 경우 왕의 동생 등 갈문왕 제도가 있었음. 고구려는 최고 귀족들이 정치, 사회 독점하고 백제는 8성 귀족, 왕족인 부여씨 왕족인 진씨나 해씨 등 8성 귀족이 특권 독점. 신라는 골품제에 바탕을 두고 진골, 성골 등 독점한 전형적인 귀족사회.
평민-대부분은 농민, 용민(남의 토지 경작, 품팔이-평민 중 가장 하층) 미천왕이 왕이 되기 전에 을불설화, 어린 나이에 왕실에 쫓겨나 새를 쫓거나 소금 장수 밑에서 노동을 했다는 얘기가 나옴..
삼국시대 천민은 대다수가 노비. 노비가 되는 경로는 전쟁에서 패하거나 빚을 제때 갚지 못하거나(부채 노비), 죄를 지어서 노비가 되는 경우. 통일 이후가 되면 삼국시대는 전쟁이 치열하니 전쟁노비 비율이 높다가 통일 이후에는 전쟁 노비가 감소.
고구려: 여자의 투기를 엄히 처벌(관나부인-동천왕 소실 관나부인 이야기가 나옴)
백제:간통한 부녀자는 남편집의 종이 됨.
고구려-패전자와 번역자는 사형, 절도자는 12배로 배상(부여의 영향)
풍습-형사취수제, 서옥제, 진대법
형사취수제나 서옥제는 고구려의 지배층의 풍습. 평민은 결혼때도 돼지고기와 술을 줄 뿐 별다른 예물을 하지 않았음. 평민은 자유롭게 연애 및 결혼 가능.
백제 -법률은 매우 엄격, 패전자와 살인자는 사형에 처함. 백제는 남의 문제를 훔치면 두 배로 배상.
부여와 고구려는 12배 배상. 뇌물,횡령죄는 평생 금고형에 처하고 3배를 배상,
풍속-투호와 바둑, 장기(지배층의 오락)
양직공도, 안압지 출토 주사위
양나라는 40년 정도 존속 황제 남조 양무제 시절 백제 무령왕과 성왕이 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임. 양직공도에 그 사실이 있음. 양나라의 비단에 그림과 글로 쓰여진 것.
안압지 출토 주사위, 통일 신라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 엿볼 수 있다.
신라의 사회 모습
화백회의-국가 중대사를 귀족들이 만장일치로 결정. 국왕와 귀족의 권력 조절 기능.
화랑도-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 초기 부족사회부터 화랑도 있었음. 진흥왕 때 남자 중심의 준군사 조직으로 개편. 화랑도는 용모가 수려한 진골 귀족 중 뽑고 그를 따르는 무리를 낭도.(귀족+평민) 계급 갈등 조절, 세속5계 7세기 초 두 명의 화랑이 원광법사에게 가르침 달라고 함. 그래서 원광법사가 세속5계 알려줌. 사군이충,사충이효, 임전무퇴, 등등
골품제도: 성립-족장 세력을 통합 편제하여 폐쇄적인 신분 제도.
사루 6촌의 원래 지배층이 골집단을 형성한 듯. 6세기 중반 진평왕 아버지 동륜이 자신의 신성성을 표현하기 위해 성골이라 한 듯. 성스러운 뼈, 왕위는 반드시 성골 중에 계승. 나중에 여왕이 등장한 것. 성골 중에 더 이상 왕위 계승이 어려워지자 진골 출신 김춘추가 군주가 됨.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등장하면서 성골계는 없어진 거라고 봐도 무방. 통일 이후는 진골이 사실상 최고 지배층이 됨. 신라가 경주의 사로 육천에서 출발, 점점 대구, 경북, 영천으로 세력 확장, 이 지방의 세력가 족장이나 읍락의 우두머리 등을 신라의 지배틀 안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골품제를 정비. 통일 이후 되면 하위두품(3두품, 2두품, 1두품)은 거의 구별이 희미해지고 평민과 비슷해짐.
통일 이후에도 6, 5, 4두품의 구별은 여전히 남아 있음. 진골이 진짜 지배층이 골품제도에 지배층이 편입된 이들은 주로 왕경인들, 경주와 소경에 속한, 지방세력들은 골품에 포함되지 않음. 신라 골품제도 중요한 특징 정치면에서 골품에 따라 관등의 상한선 규제를 받음. 진골은 아무런 제한이 없지만 6두품은 아찬까지밖에 못 올라감. 5두품은 대나마, 4두품은 대사까지 올라갈 수 있다. 골품제도는 골품에 따라 집의 크기도 다름. 기와의 와당, 우물 덮개 등조차 골품에 따라 규제를 받음. 여자들 속치마 길이까지도....
골품은 정치활동의 범위 제한 측면 뿐 아니라 가옥, 복색, 수레, 담장의 높이까지도 규제하기 때문에 사회 활동의 범위를 제한 규제한다는 의미. 신라의 골품제도에서 가장 문제 계급이 6두품. 원래 귀한 신분이었음 득란(얻기 어렵다고 했음) 사로 6촌의 원래 지배층 가문이 아닌데 신라 진골이 된 사람이 금관가야의 왕족이던 김유신 집안과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이던 안승. 신라 왕실과 사돈 맺으면서 진골에 편입. 원래 사로의 지배층이 아무리 잘 나도 신라에 편입이 되어도 6두품 밖에 못 받음. 6두품도 대족장 출신만 받음. 6두품도 제한을 많이 받으니 나중에 불만의 요인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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