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로육천이 신라의 뿌리, 이사금 칭호(박석김이 교대로 왕위 차지) 최고 권력자를 이사금이라 함. 이사금은 이빨자국이란 뜻, 떡을 물어 이빨 자국이 더 많이 난 사람이 왕, 이가 많을수록 연장자란 의미. 전형적인 연맹체 국가 모습.
신라는 사로국에서 출발한 진한의 소국
4세기 17대 내물왕
김씨 왕위 세습제 확립-이는 왕권 강화 징조, 최고 권력자를 마립간으로 부름 마립간은 고갯마루 높다는 뜻, 간은 칸, 우두머리 수장 뜻, 이사금보다는 최고 권력자의 권력 강화 의미. 낙동강 동쪽 지역 진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도움으로 왜구 격퇴(400) 이후 왜를 물리치고 신라는 이때부터 상당기간 고구려의 영향권 하에 있음. 이의 증거로 호명그릇이 있다.
실성왕
왕의 조카이며 인질로 고구려 갔다가 와서 돌아와서 내물왕 죽이고 왕이됨. 나중에 고구려가 실성 내치고 내물왕 아들 눌지왕 올림. 다음 눌지왕은 나제동맹 결성(433), 눌지왕은 처음에 친 고구려 정책펴다 외교적인 변화를 꾀함, 백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 간섭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나제동맹 결성. 493년 소지왕 때 결혼동맹 맺음. 그러던 신라가 4~5세기만해도 동남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였음, 6세기가 되면 뛰어난 군주가 3명 연달아 등장.
지증왕-법흥왕-진흥왕
6세기 지증왕
신라 국호(그전에는 계림, 사로, 사라), 소지왕 때까지 마립간으로 불리다가 지증왕부터 중국식 왕 호칭, 이사부 장군 시켜서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 복속, 지방제도를 중국식 주와 군으로 정비(주, 군), 순장 금지, 우경 시작.
지증왕 아들 법흥왕은 병부와 상대등 설치, 병부는 군사 담당, 상대등은 신라 귀족중 최고 수장이 상대등. 율령 반포, 17관등제를 만듦, 공복 제정(자비청황), 이차돈의 순교 계기로 불교 공인, 금관가야 정복, 건원이란 연호를 쓰기 시작함.
법흥왕 조카로 왕이 된 진흥왕은 화랑도를 개편. 화랑도는 신라 국초부터 있었음. 여자 원화가 리더. 진흥왕때 남모와 준정이 서로 질투하다 조직 깨져서 해체, 이후 남성 중심의 준군사 조직으로 재편. 화랑도 개편이 삼한일통이 될 수 있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화랑 출신 영웅이 많음. 백년 뒤 삼한일통의 토대. 그리고 불교 교단을 정리 국통, 주통, 군통으로 불교 교단을 정리, 불교를 이용해서 중앙집권을 강화했다는 뜻. 그리고 진흥왕 때 팔관회 개최.
법흥왕 때 거칠부가 고구려의 스파이로 파견, 그때 고구려 승려이던 혜량이 설법하다 거칠부 신라 스파인줄 알고도 품어 줌. 거칠부 장군이 나중에 고구려에 출병했을 때 혜량이 신라로 와서 기부를 함. 혜량이 신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전몰장병을 위한 위령제에서 시작한 것이 팔관회. 진흥왕은 개국이란 연호를 사용, 한강 유역 정복 활동.
정복활동의 증거 단양적성비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을 먹으면서 중국의 왕조와 직접 접촉. 중원왕조가 한반도보다 문명이 3~4백년 앞서 있었음. 바다를 통해 중원과 교류할 수 있는 지역이 한강 하류 지역. 백제가 차지하다 고구려가 5세기 차지하다 6세기 신라가 차지. 진흥왕의 이런 정복활동은 단양적성비(13명의 장군)에 야이차를 특별히 비문에 언급. 야이차는 협조한 현지인 이름임.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는 옛 고구려터를 차지하고 세운 것. 북한산비는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했다는 것을 보여줌. 진흥왕 순수비는 진흥왕이 직접 개막식 참석-북한산비, 단양 적성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신라의 주요 비석
비석명 | 건립연대 | 내용 |
포항 중성리비 (501) |
지증왕 | 재산 분쟁과 관련된 판결을 기록, 현존 최고 신라 금석문 |
영일 냉수리비 (504) |
지증왕 | 지증왕과 6부 대표자들이 절거리라는 인물의 재산 분쟁을 판결한 것을 기록, 사라(신라 국호) 관등명(아간지, 나마) |
울진 봉평비 |
법흥왕 | 울진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군사 동원 사후 처리를 위해 회의를 열고 판결한 것을 기록, 율령의 반포와 시행(노인법, 장형) |
영천 청제비 |
법흥왕 | 저수지 축조와 중수에 관한 내용 |
단양 적성비 |
진흥왕 | 적성 점령에 대한 포상과 민심 수습 |
진흥왕 순수비 | 진흥왕이 직접 개막식 등에 참석한 비 | 북한산비가 대표적. 창녕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
남한산성비 | 진평왕 | 남산신성 축조에 동원된 인명과 붕괴시 책임 소재를 서약 |
임신 서기석 |
진평왕 | 두 명의 청소년이 맹세한 내용을 기록(아마 화랑이었을 것) |
6세기말 7세기 초 신라 상황
수의 침입-고구려의 말갈 기병 이용해 요서 선제 공격(598)→살수대첩(612, 을지문덕)
당의 침입-연개소문의 대당 강경 외교(천리장성)→안시성 싸움(645)
7세기 전반 신라 상황
신라 진평왕(579~632)
고구려 등의 한강유역 노리자 진평왕이 원광법사에게 시켜서 원병을 청하는 글을 짓게한 것이 걸사표(608, 수에 원병 요청), 승려가 국사에 관여하는 것은 호국불교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수의 양제는 수락해서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요동성을 비롯 고구려 침공했으나 어려워지자 우회해서 평양성을 향해 진군. 수나라 수군은 돌아감. 고구려 을지문덕이 수 우중문보고 돌아가라고 함. 돌아가는 우중문의 군대가 살수에서 몰살. 상당수는 고구려의 노예가 되었고, 수나라 군대를 위한 위령비 세움. 살수대첩에서 수나라가 엄청 고구려에 깨짐.
고구려 영양왕(590~618)
수의 2차 침입(612, 살수대첩). 613년 고구려 공격했으나 실패, 4번다 고구려에 안 되었음. 무리한 고구려 원정이 실패하면서 수왕조의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당이 중원의 새 주인이 됨. 수양제의 무리한 고구려 원정이 수나라의 멸망을 촉진시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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