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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인문학)/모든것의 역사

고대 중앙집권 국가 중 고구려 성립과 발전

by roo9 2021. 8. 10.

고대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한 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이며 가야 연맹체는 소국들이 고만고만하였다. 금관가야, 대가야 주도하긴 했지만 압도하진 못하고 연맹 왕국 단계에 머무르다 신라나 백제에 복속 당했다. 그래서 가야는 중앙집권국가로 보지 않는다.

 

백제는 마한의 54국 소국이었다가 한강 유역에서 성장한 백제국이 한강 유역을 정복하면서 상당한 통치 조직을 정비하고 근초고왕 때 영토를 확장하면서 강력해졌다. 신라도 삼한의 소국이었으나 4세기 후반 내물왕 때 내물왕 김씨가 독점적으로 사용하면서 호칭이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이는 왕권 강화를 의미한다.

 

 

왕권 강화를 뒷받침한 고대 중앙집권 국가

 

고구려, 백제, 신라는 왕권 강화, 관등 제도, 관복 제도, 율령 반포, 다중다양한 부족을 흡수 통합함.  불교를 왕실이 주도적으로 수용해서 통치체제, 왕권 강화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한다. 이를 고대 국가 또는 중앙집권국가라고 한다.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고국천왕(2C 후반) 왕의 부자 상속제 확립
5부 개편(부족행정), 진대법 실시(을파소 재상 기용해서 진대법 실시, 춘궁기에 곡식 빌려주고 가을에 갚게 함, 빈민 구휼이 목적)
미천왕
(4세기 초)
서안평 점령, 낙랑군 축출(중국의 군현세력)
고국원왕 랴우둥 방면 진출하다 진연의 침략, 황해도 방향 진출하다 평양 전투에서 전사(371)
소수림왕
(4세기 후반)
전진과 교류, 불교 수용(372)
태학 설립, 율령 반포-내부 체제 정비 주력

 

 

광개토왕 -만주 정복(후연격파), 백제 여러차례 공격, 연호(영락), 신라에 침입한 왜군 격퇴(400) 위대한 정복 군주로 불림.

장수왕-평양 천도(427) 남진 정책, 한성 함락(475), 한강유역 정복(충주 고구려비), 남북조와 동시 수교, 흥안령 일대 진출 시도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

                           

 

국내성에서 오늘날의 평안도 지방을 점령하면서 국가 발전의 중요한 전기를 맞이함. 4c초 미천왕 때 서안평 점령, 낙랑군 세력 축출, 평안도 지역 차지.

 

미천왕-미천왕은 언덕에 묻혀서 미천왕이라고 한다. 아들 고국원왕(331~371, 고국에 묻혔다고 고국)-소수림왕(371~

광개토왕(중국은 호태왕이라고 함. 호태에 묻혔다고)

 

모용선비(전연)-미천왕 시신 가져가고 엄마가 개처럼 끌려감 그래서 고국원왕 때 백제는 근초고왕 시대, 근초고왕은 북상하고 있었음,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백제한테 털림. 371년 전투시 백제 근초고왕 아들이 평양성 교전에서 고국원왕의 화살 맞고 죽음. 아버지 죽고 어린 나이 왕이 된 고구려 17대 군주 소수림왕은 내부 체제 정비 수습에 주력, 북중국의 전진이란 나라와 교류, 거기서 불교 수용(372)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 설립하고 율령 반포.

 

 

 

광개토대왕 정복 활동 중 가장 중요한 건 백제 공략 396, 관미성(지금의 통일 전망대 추정) 함락시키면서 지금의 파주 고양시 일대를 개박살, 광개토 대왕이 후연을 격파하고 만주를 정복했다. 백제를 여러 차례 공격. 399년과 400년에 바다 건너 왜가(정확하게 모름) 금관가야를 통해 신라의 변경을 침입하자 신라의 내물왕이 광개토 대왕에게 도움 청해 5만명 보내줘서 왜군 격퇴. 광개토왕의 신라출병기사. 광개토 대왕은 우리나라 최초로 영락이란 연호를 사용했던 군주. 비운의 군주, 위대한 정복활동임에도 불구하고 39세에 자신의 정복지를 순행하다 동부여 땅에서 누군가 쏜 활에 맞아 돌아오다 죽음. 뒤를 이어 궐연이 왕이 됨(장수왕) 장수왕은 왕을 79년이나 함. 97세까지... 우리나라 최장수 재위 기간 기록. 5세기 중후반은 장수왕의 치세. 장수왕은 평양천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 옮김.

 

천도는 왕권강화나 체제 정비 목적

 

 

단순한 남하 정책 뿐 아니라 왕권 강화나 해상 진출에 유리한 서해 쪽으로 진출한 의도. 체제 정비... 장수왕 때 중원의 정세는 남북조 분열시대. 전통적으로 고구려는 북조 정권과 수교를 맺어 옴, 백제는 남조 정권과 외교를 맺어 옴. 고구려는 남북조와 외교 관계 수립. 고구려 파워가 강하니까 양쪽 정권 외교수립이 가능했던 것.

 

장수왕의 정복 활동

 

 

장수왕의 정복활동은 백제를 계속 자극하고 때림.  백제왕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에 맞서 신라를 끌어들여 동맹을 맺음 (434년 나제동맹) 장수왕은 백제를 계속 압박, 백제 개로왕이 북위 황제에게 도움 요청(472년 북위국서) 그러니까 북위 황제가 난감, 북위도 고구려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음, 북위측에서 백제의 지원 요청을 거부하고 고구려에게 귀뜸. 장수왕은 명분이 생기고 4753만대군으로 백제 침략, 백제 개로왕은 뒷산 아차산으로 튐. 체포하고 목을 따버림. 태자였던 문주가 신라에게 쫓아가 군대 끌고 왔더니 백제 수도 한성은 함락되고 왕은 죽어서 도읍을 웅진으로 옮김(지금의 공주) 그리고 최근 발견된 장수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비가 발견되어 충주 고구려비라고 개칭. 이는  장수왕 때 세워진 것으로 보여 충주지방까지 고구려 세력이 뻗혔다고 봄.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가 고구려 최 전성기

 

 

호우명 그릇(광개토왕의 명호가 씌여진 그릇인데 경주에서 발견된 이유: 장수왕 때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일 듯. 최측근에게 하나씩 준 듯. 그 중 하나가 신라 무덤에서 발견. 이는 신라가 상당 기간 동안 고구려 영향권 아래 있었다는 것 증명함. ad 400년 이후 신라가 고구려의 정치 군사적 영향권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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