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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인문학)/모든것의 역사

세계 역사 최초의 조상을 찾아서

by roo9 2021. 9. 6.

인간에게 건조함은 치명적이다. 노화의 전조이기도 하고 그것은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에 빠져 죽지 않는 한 촉촉한 상태를 유지하며 죽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인류는 건조가 진행되면서 삶이 활기를 찾았다.

 

 

무리 사회를 이루며 뗀석기를 이용한 구석기 시대를 지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즈음 유라시아 남부에서는 극심한 건조기후가 진행되고 있었다. 갈수록 극심해지는 더위로 숨이 턱턱 막혀오고 건조한 모래 바람때문에 죽을 것 같았지만 정작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 넣는 과정이었다.

 

만나 맞나?

 

 

인류는 갈 길을 정하지 못 한 채 사막과 초원 사이를 복불복으로 누비며 적응과 진화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러다 어떤 선구자 그러니까 돌멩이 따위에서 멋 훗날의 휴대폰을 본 한 선인이 요르단 계곡 부근을 걷다가 하얗게 내려앉은 밀알을 발견한 것을 예사로 여기지 않고 먹어 본 결과 이것을 먹고 살아도 되겠구나 하는 확신을 갖고 정착을 부추겼다.

 

 

그와중에도 못지 않게 잘난 선인이 하나 더 있어 대립각을 벌이다 절반은 동쪽의 메소포타미아로 향했고 절반은 서쪽의 이집트로 떠났다. 여기서 나의 최초의 조상은 어디로 간 것일까. 감히 돌멩이로 휴대폰을 본 선인이 조상이었다고 여기는 건 망상 같고 그냥 하던 대로 인근에 머물며 수렵 채집을 하다 죽어갔거나 동이나 서쪽 혹은 지속적으로 떠돌아 다니며 씨를 뿌리고 다녔을 수도 있었을 테고. 어찌 되었건 당시 대세는 농경생활로의 정착이었다. 

 

밥보다 빵을 더 좋아하는 나는?

 

밀을 주식으로 하는 농업 생활은 상당히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인지 먹기 위해 사는 것인지 최초의 고민이 시작되었을 테지.

 

어디 멀리 갈 것도 없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궁극적인 불행은 시작되었다. 어디든지 머무르려고 하는 순간부터 불행은 시작되기 마련이다. 죽음 역시 한 곳에 머무르는 일이 아니던가. 인간의 본질은 허공을 떠도는 먼지처럼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존재이다. 어딘가에 안착한 순간 그때부터는 불결한 쓰레기 더미가 되고 마는 거다. 그렇게 신은 밀알로 인간을 유혹했고 이후 수천 년동안 지옥 같은 굴레에 빠지게 되었다.

 

 

정착 유혹에 빠진 이들은 인간 뿐만이 아니었다. 먹을 것이 생겨 정착한 인류와 마찬가지로 먹이를 찾아 몰려드는 인간 친화적인 혹은 모험심 강한 염소나 양 등의 동물들이 인간 세상을 기웃거리기 시작했고 일부 똑똑한 인간들은 그것들이 주요한 단백질원이 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것들을 집중 관리하기 시작한다. 이것들을 길들이는 과정이 녹록치는 않았겠으나 어쨌거나 인류의 일부는 목축업에 빠져들었고 그들을 따라서, 혹은 그들을 위해서 밭을 벗어나 풀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는 북쪽의 초원지대로 이동하였다.

 

나가기 귀찮아. 햇볕 시러. 나 돼지 농경생활 추구

 

인간과 동물의 공생이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에도 각자의 취향 혹은 성질이 좌우된 까닭이라 해도 될런지 모르겠으나 돼지만은 건조한 기후와 햇볕에 취약해 농경사회 정착하게 되었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먹이 혹은 동식물을 인위적으로 가둬두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스스로를 가둬두는 행위는 거기서 그친 게 아니었다.

물과 불도 그들의 안락을 위하여 제어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착 생활은 인류가 생식활동을 멈추지 않는 한 좋거나 싫거나 확대 될 수 밖에 없다. 특히 건조지대에서는 물 확보가 어려워 큰 강유역에 대규모 밭이 만들어졌고 그더다보니 제방, 수로, 저수지 등의 필요 조건으로 대대적인 토목 공사가 필요했다. 아시다시피 물의 도시가 탄생한 이유다. 도시가 탄생하니 기록을 위한 문자가 사용되었고 측량, 건축 등이 발달한 것이고. 큰 유역으로 도시가 생기면서 시스템이 정착하게 된다.

 

소위 국가가 탄생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는 1 전에 만들어진 요르단 유역의 여리고란 지역이라고 한다.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동시에 고도가 가장 낮은 도시이다. 여리고 지역 주변의 요르단 강은 팔레스타인의 시리아에서 발원하여 갈릴레이 호수를 거쳐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며 바다로 들어가지 않는다. 구약에 명시되었듯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을 하던 동포들에게 약속한 땅이 가나안, 현재의 팔레스타인인데 이곳을 가기 위해 요르단 강을 건넜다고.

 

요단강

 

즉 약속된 복된 곳에 들어가는 천국을 의미하고 그러지 못하면 저승으로 간다는 의미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스틱스 강, 동양의 삼도천, 황천행, 북망산 가는 길은 모두가 이 요르단 강(요단강)을 건넌다는 의미이다. 어쨌거나 밭이 적어 식량의 자급자족이 안 되던 여러 도시들은 여러 농촌들로부터 조달을 해야 했고 이 와중에 약탈 및 전쟁 혹은 협상도 있었을 터, 이러한 모든 것을 정비하는 관료제, 종교조직, 군대, 법률 등을 정비하고 정보전달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지배조직이 재정비되는데 이것이 국가 탄생의 요인.

 

비옥한 이집트 문명과 척박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달 차이

 

농업을 기초로 발달한 국가라지만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전혀 다른 농업사회였다. 남과 북이 다르듯 이집트는 축복받은 자연 환경으로 비옥한 토지아래 당시 가장 축복받은 곳이었다. 나일강이 범람하기 시작하는 시기 일출 무렵 샛별 시리우스가 태양과 같은 위치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집트인들은 그 날을 1월 1일로 정하고 현재 달력의 기원인 1년 365일의 태양력을 만들었다.2500년 동안 파라오 왕조가 지속되는 동안 문화는 날로 번성해갔다.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는 토지라는 뜻이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수메르 지방이 문명의 중심지였지만 비가 도통 내리지 않아 물을 가둬두는 수로나 저수지 등을 만들어야 했고 주변 물부족에 시달리는 도시 국가들의 침범에 대비해 견고한 도시군을 형성했다. 이집트인들이 파피루스라 불리는 종이에 글을 기록할 수 있도록 상형문자가 발달했다면 메소포타미아는 점토판에 설형문자를 새겼다. 풍족함과 부족함의 차이로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보다 과학적이고 정교한 발전을 하였는데 하루 24시간, 1년 12개월부터 60진법, 태음력 등 변수의 해결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축복의 땅 이집트가 지리적으로 폐쇄되어 있던 이집트와 달리 메소포타미아는 부족간의 잦은 전쟁마저 겪어야 해서 대립 완화를 위해 법률 또한 발달했다. 문명이 척박한 곳에서 꽃을 피우는 이유는 물품 수급을 위해 자꾸 머리를 써야했기 때문. 운송 수단이 필요해 배 만드는 기술이 발달해 교역도 활발해지고, 최초로 벽돌도 만들어 집도 짓고 성전도 짓고 바퀴도 발명하고 무기도 만들어 농업 생활보다 전쟁으로 인한 약탈로 경제를 번성하는 것도 알게 됨. 농업경제에서 노예경제시대로 가는 수순. 그 중심에 수메르 문명의 우르 지역이 있었다지. 우르는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의 고향이고. 

 

 

기원전 19세기에 새롭게 진출한 아모리인은 후에 메소포타미아를 점령, 유프라테스 강 중류지역에 위치한 바빌론을 수도로 하여 바빌론 제1왕조를 건국하였다.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한 함무라비가 그 유명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법전을 만든 분이라는 점.

 

모헨조다로

메소포타미아와 뿌리가 같은 인더스 문명은 파키스탄 지역에서 전개되었지만 자연관개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이집트 문명과 비슷하였다. 여기서 나의 조상이 파키스탄 지역이 근원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추가된다. 어쨌든 인더스 문명에서는 종이나 점토와는 다르게 면직물에 문서를 기록하는 바람에 확인에 어려움이 많았다. 인더스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발생한 상업적인 성격이 강한 걸로 보아서 혈통이 아닐까 의구심이 들긴 하지만 아리아인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당시 인더스 문명을 하라파 문명이라고 불렀는데 그곳이 문명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전성기는 있는 법. 

 

 

동양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조상들이 황하 문명과 양자강 문명에 더 가까이 속하지 않을까 하는 당연한 생각이 들수도 있지만 애초부터  최초의 조상은 정착생활의 시발점에 놓여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보다 나은 정착을 위해 멀리 떨어진 동아시아까지 흘러갔었을 거란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조를 재배하고 그마저 씨가 작아서 죽으로 먹었다 하는데 나의 조상이 그렇게 스케일이 작았을리가 없다. 양자강에 발달한 쌀을 먹고 자랐다면 또 모를까. 하여 관개가 아닌 전쟁에 의해 형성된 중국 문명이 내 조상의 뿌리라는 점은 도저히 인정하기 어렵다.

 은 왕조 시대에 열 개의 태양(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이 하루 하루 번갈아가며 비춘다고 생각하여 은왕은 자신을 태양신의 자손이라 불렀고 이는 훗날 서아시아에서 전해진 십이지와 합쳐져 시간, 방향 등을 나타내는 간지가 되었다. 한자의 기원인 갑골문자를 만들고 천명설을 믿은 걸 보면 나의 조상이 받은 신의 계시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게 사실이긴 하나… 그래도 나의 최초의 조상은 중국 문명보다 조금 더 과학적이고 치밀했을 거라 믿고 싶다.

 

원시부족 신앙 뭐, 다신교, 우상 숭배 이런 시절을 지나 세계적 종교와 철학이 같은 시기에 출현한 이유는 지금까지도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의 같은 시기에 유라시아에서 현재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모태가 되는 유대교, 불교, 유교, 그리스 철학 등의 종교. 철학이 출현했다. 

 세계문명사는 직선형으로 발달한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기간에 이르러 근본적인 변화와 질적인 도약을 겪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추축시대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싯다르타, 공자, 소크라테스 같은 사상가들이 동서양에 나타나 세계문명사의 발전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이 말해주는 공통점은 사람중심의 철학사상이라는데에 있다. 어떤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고 가상 존재를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던 자연종교와 그에 기초한 고대문명을 훌쩍 뛰어넘은 사상사적 전환과 문명사적 전환이 바로 그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추축시대는 낡은 제국이 몰락하고 아직 새로운 제국이 출현하기 이전의 중간기에 해당한다. 기원전 2,000년부터 612년까지 기간동안 존속하던 아시리아 제국이 몰락하고 기원전 336년부터 323년까지 짧은 기간동안 존속하던 마케도니아 제국이 출현하기 전까지의 중간기에 추축시대가 위치한다는 것이다.

 

세계 최초의 기마제국 아시리아 제국

 

 

그중에서 고대 아시리아는 중동에서 기원전 605년까지 존재한 가장 강성하던 나라였다. 그들은 히타이트를 물리쳐서 나라를 세웠는데 초기에 아시리아는 티그리스 상류 지역을 부르는 말이었으며 고대 도시이자 수도이던 아수르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아시리아 본토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전체에 해당하며 니네베를 수도로 하였다. 아시리아 제국은 세계 최초의 기마제국이었다. 쌩쌩 달리는 말이 원래부터 있던 게 아니다. 이전에는 탈 수 있는 수준이 아닌 조랑말이나 노새 정도로 작고 느렸다가 교배 등으로 사람이 탈 수 있게 된 것. 

 

기원전 7세기 중반쯤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조로아스터는 서른 살에 아후라 마즈다의 계시를 받아 불을 신성시하는 조로아스터교를 만들었다. 그는 낮과 밤이 규칙적으로 반복된다는 사실에 힌트를 얻어 이분법적인 투쟁 과정을 설명하였다. 조로아스터교는 초원지대의 종교라고 있는데 종교와 사상은 자연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조로아스터교는 신들의 최종결전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며 광명신 아후라 마즈다를 추종한 자들만 천국에 있다고 말했다. 이후 조로아스텨교는 동북이란에서 페르시아인들에게 수용되어 기원전 6세기에 대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종교가 되었다. 후에 기독교에서 좋은 점만 취합한 걸로 알고 있음. 또한, 이슬람교가 확산되기 전까지 1,000년간 조로아스터교는 서아시아를 대표하는 종교였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반도의 최북방에 있던 고대 왕국으로 서쪽으로는 에페이로스, 북쪽은 파이오니아, 동쪽은 트라케, 남쪽은 테살리아 지방과 접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를 비롯하여 인더스 강까지 진출하면서 마케도니아는 짧은 기간 동안 고대 근동에서 헬라스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때를 기점으로 그리스 역사의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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