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umanities(인문학)/모든것의 역사

발해의 흥망성쇠

by roo9 2021. 9. 7.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은 유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실시했다. 고구려의 지배를 받던 거란 말갈족들도 당의 지배를 받았다.이후 거란족은 반란을 일으켰고 당은 겨우 반란을 진압했지만 다른 종족을 술렁이게 했다. 속말갈 출신 고구려 장군이었던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당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들을 규합하면서 세력을 늘렸다. 대조영은 만주 동쪽의 동모산으로 옮겨갔고 698년 이곳에 건국하고 진국이라 하였다. 당이 외교 관계를 요청하였고 대조영은 돌궐과 신라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면서 당을 견제하고자 했다.

 

동모산에서 진국을 세운 대조영

 

 

 

돌궐이 당에 포섭되어 무너진 뒤에는 당과 평화 관계를 맺었다. 713년 당에서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는데 이때부터 발해라는 이름이 쓰이게 되었다.

 

대조영 뒤 무왕

 

대조영을 이어 719년 즉위한 무왕은 인안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하고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그러나 동생 대문예의 배신으로 당으로 망명을 가고 이를 위한 실랑이를 벌이다 당이 발해와 대립하여 신라를 끌어들였고 신라는 이 틈에 당과의 악화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지만 발해는 떠나고 신라는 추위 때문에 철수한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 이남의 땅을 당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 받았다. 싸움이 안되자 당은 우호관계로 바꾸려하고 733년 둘은 결국 국교를 맺었다. 발해는 적극적으로 당 문화를 받아들여 귀족문화의 꽃을 피운다.

 

지배체제를 정비한 3대 문왕

 

 

 

3대 문왕은 지배 체제를 정비하는 일에 더욱 힘쓴다. 전국을 부, 주, 현으로 편성해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중요한 부에는 경을 설치해 5경을 두었다.

3성 6부를 비롯한 중앙 정치 조직도 갖추었다. 여러 차례 수도를 옮기다 당의 장안성을 본떠 건설한 계획도시 상경으로 자리잡는다.

 

10대 선왕의 활발한 대외활동

 

 문왕이 죽은 후 분쟁이 계속되다 818년 10대 선왕이 즉위하며 분쟁을 해소하고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인다. 5경 15부 62주의 지방 행정제도도 완비했다. 선왕대부터 크게 융성한 발해는 사방 5천리에 이르렀다고 전하며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발해의 지배체제와 대외관계

 

발해는 당의 책봉을 받았지만 황상이라며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다. 중앙 정치 조직으로 3성 6부를 두었고 3성 가운데 정당성은 귀족 관료들의 합의 기구로서 행정을 통괄 집행하였고 선조성과 중대성은 왕명의 초안을 잡고 정책을 심의하는 역할을 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을 대내상이라 하고 그 밑에 좌시성과 우사정이 있어 6부를 각각 3부씩 관리하였다.

관리인사-충부

재정 담당-인부

의례와 교육 담당- 의부

군사 담당- 지부

사법과 형벌-예부

수공업과 토목공사-신부

 

중정대는 관리의 감찰을 맡았고 문서와 서적을 담당한 문적원, 국립대학인 주자감 등의 기관이 있었다. 부에는 도독, 주에는 자사, 현에는 현승이 파견되었고, 현은 성읍과 말갈 부락으로 구성되었고 중심이 되는 성읍이 다수의 부락을 통제했다. 부락의 말갈족장들은 수령이라 했다.

세금 징수나 노동력 징발 등의 임무를 담당했고 그 대가로 수령들에게 대외 교역에 참여하는 특권을 주었다. 중앙의 군대는 10위로 편성되었다.

 

발해의 사회와 문화

 

다민족 국가였고 복합적 성격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당나라처럼 국제적 성격의 귀족 문화를 이루었고 지배 사상으로는 유교와 불교가 있었다.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묘를 참고할 때 도교적 성향도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발해 문화를 엿 볼 수 있는 대표적 양식으로 정혜공주묘는 돌방무덤으로 고구려 전통에 따른 것이지만 정효공주묘는 벽돌 무덤으로 당 문화의 영향을 보여 주었다.

 

발해의 멸망

 

9세기 후반 당이 쇠퇴하면서 동아시아 국제 질서가 무너지게 되었다. 907년 거란족 가한으로 즉위한 야율아보기는 거란을 통일하고 916년에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발해는 신라에게 동맹을 꾀했으나 신라는 오히려 거란에 사신을 파견해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요 태조 야율아보기는 요동을 공략한 뒤 925년 직접 발해 중심부로 쳐들어왔다. 기습을 받은 발해는 20여일만에 급속히 멸망해갔다.

모두가 발해 지배층의 분열 때문이었다. 이때 발해의 왕자 대광현은 수천 명을 이끌고 거란을 벗어나 고려로 넘어갔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