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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 story/뷰티 앤 패션 노하우

[beauty people] 독특한 귀때문에 멋쟁이가 된 배우 글로리아 스완슨

by roo9 2021. 2. 10.

글로리아 스완슨은 1899 3 27 일리노이주의 시카고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미군 수송 부대 민간 관리직이어서 이동이 잦아 어릴 때 자주 이사를 다녔다. 어릴적부터 글로리아는 아름답고 재능이 많은 아이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위해 예쁜 옷을 지어서 입혔다. 그녀의 엄마는 딸에 대한 고민이 한가지 있었는데 그녀의 귀가 남들보다 커서 항상 그것을 숨기기 위해 그녀만을 위한 특별한 모자와 귀마개 같은 것을 만들어야 했다고 한다. 이것이 훗날 그녀가 남다른 감각의 멋쟁이가 되는 데 일조한 건 아닐까. 그녀의 성공은 엄마 덕분이네.

 

1920년대 최고 배우 글로리아 스완슨 스토리

 

 

그런 탓인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글로리아 스완슨은 유독 귀를 덮은 사진이 많다.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귀가 큰 것도 그렇지만 짝귀에 당나귀 모양으로 튀어나와 미관상 예뻐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글로리아 스완슨은 어린 시절 잠시 푸에르토리코에 머물기도 했는데 학교 연극에 출연해서 오페라 스타로 등극했었다고. 15세 무렵에 시카고로 돌아가 이모를 따라 영화 스튜디오를 구경했지만 글로리아는 당시 영화 제작에는 매료되었지만 영화 자체는 조잡하고 저속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슬랩스틱 코미디가 유행한 것도 있었고. 이것이 훗날 본인 제작사를 차리게 된 계기가 된 듯하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리아는 영화가 끌렸던지 단역으로 시작했고 그녀의 매력적인 외모와 세련된 옷차림은 스튜디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영화 일을 기꺼이 할 수 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돈도 벌고 그 돈으로 옷을 살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시카고 스튜디오에서 일하면서 얻은 것은 또 있었다. 그녀의 첫 남편 월러스 베리였고 그는 이후 그녀에게 헐리우드로 이사하자고 설득한다. 

 

1914년 ‘the song of soul’에서 단역으로 데뷔한 이후

 

1919년 파라마운트와 계약해 이제 20살도 안 된 어린 청년 감독 세실이 연출한  ‘don’t change your husband’ 등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세실 드밀 감독의 ’male and female’을 찍고 1920년작 ‘something to think about’ 그리고 1921년 ’the affairs of anatol’ 의 영화에 히트하면서 영화계의 아이돌로 급부상했다.

 

특히 관객들은 드밀이 연출한 영화 속 그녀를 사랑했는데, 글로리아 스완슨의 외모 뿐만 아니라 오튀쿠튀르적인 패션 스타일에 열광했다. 그녀의 의상부터 헤어스타일 액세서리 모든 것이 신세계의 룩을 보는 듯 했던 것. 어쩌면 코코 샤넬의 짧은 영화 의상 커리어를 통해 샤넬의 의상을 돋보이게 큰 역할을 한 데에는 글로리아 스완슨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샤넬의 쿠트뤼 패션은 대중의 시선을 확실히 잡아두었기 때문이다.

 

 

글로리아 스완슨의 트렌드 세터 역할로 인해 당시 주류 패션이던 수수한 플라넷 천에서 화려한 시폰 천으로 대체되는, 한마디로 패션 시장 경제의 흐름을 뒤바꿔 놓았다. 사치와 낭비로 유명한 스완슨은 1918년부터 1929년까지 약 8백만 달러를 벌었고 그 많은 돈을 거의 탕진했다. 야무지게 일하고 거룩하게 쓰자 주의였다 봄. 돈 벌자마자 화려한 저택에서 사셨다고. 평소 건강식품 옹호자로 알려진 그녀는 적절한 식단과 인공 첨가제나 설탕 과다 섭취를 자제하고 오염된 공기, 토양, 물 보호에 힘쓰며 켐페인을 벌였다.

영화 속 스타일로 인해 글로리아 스완슨은 대체 불가 매력적인 배우로 등극했지만, 정작 그녀는 하나의 틀에 박힌 화려한 이미지로 남기보다 보다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 줄 독립적인 개체로 인정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이 여배우들이 으레 하는 소리겠거니 했지만 그녀는 정말로 다재다능한 배우였던 것.

 

 

똑똑하고 돈 버는 재주도 있던 스완슨은 1926년 이후 보스톤의 금융 재벌 케네디를 재정 고문으로 내세우며 자신의 제작사를 설립했다. 훗날 그와의 불륜 스캔들을 담은 자서전이 1980년에 출간되어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는…. 암튼 배우와 제작자를 겸하면서 모든 면에서 승승 장구하는 듯했다. 1930년대 말에는 뉴욕으로 건너가 유대인 출신 발명가를 미국으로 데려오는 회사 멀티프리제 차리고 일련의 정치 모임을 주최하면서 10년 동안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다. 남다른 패션 감각의 소유자로 알려진 만큼 미용 제품 및 패션업에도 손을 대었고 그녀의 아이디어와 노력으로 이윤 증가에 도움이 되었지만 점차 유행에 뒤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후 16년간 영화계에는 발을 딛지 않더니 1950년에 이르러 ‘sunset boulevard(선셋대로)로 골든 글로브 여우 주연상과 세 번째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그녀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단순히 매력적인 배우였다기보다 영화 연출과 제작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남다른 안목이 있는 배우란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사진을 봐도 전형적인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턱도 너무 길고 강직하고, 마녀같은 생김새이다. 

 

 

 

그러나 1920년대를 평정한 배우 중 이렇게 스마트하고 독립적이며 스타일리쉬한 배우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게다가 21세기에 유행하는 웰빙 트렌드를 백 년 전에 이미 실천하고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1970년대 글로리아 스완슨은 자신의 역량을 또 한 번 과시한다. 유엔 여성 기념 전시회용 포스터와 스탬프를 디자인했다. 대지 위에 새겨진 배아로 지구를 묘사한 조각에는 ‘여자, 지구와 같이, 봄과 영원한 만남이 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앞서 서술한 자서전에는 그녀의 숨은 글솜씨가 두각을 나타냈다. 영화 경력에 관한 굴곡과, 개인의 고뇌를 다룬 사생활에 관해 아주 잘 쓰여진 책이라며 평단의 칭찬을 받았다. 이렇게 재주많고 독보적인 매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글로리아 스완슨. 1920년대 헐리우드의 황금기에 가장 빛나는 흥행 보증 배우였던 글로리아 스완슨은 84세에 뉴욕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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