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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 story/뷰티 앤 패션 노하우

[beauty people] 1920년대 최초의 신비주의 배우 그레타 가르보

by roo9 2021. 2. 15.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신비주의 그레타 가르보는 스크린에서 연기하는 방법을 재정립하고 놀라운 아름다움과 스타일로 수많은 대중들을 사로잡은 최초의 신비주의를 실현한 배우로 기록된다.

 

신비주의를 실천한 매력적인 매우 그레타 가르보

 

 

평생을 외롭고 고립된 여성으로 묘사된 그레타 가르보는 엄청난 인기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거리를 탓에 1990 84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신비한 인물로 남았다.

 

 

 

 

1940~1945년 사이 그녀가 스웨덴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들은 죄다 우울 일색이었다.  신비주의로 산 만큼 그녀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가히 엄청났다.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사생활

 

 

 

 

실제 일을 하면서도 영화 관계자가 아니면 절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좀처럼 사람들 앞에 나타나질 않았다. 대체 그런 성격으로 어떻게 배우가 될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을 정도이다. 게다가 시상식 같은 곳에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내는 스타도 아니었다. 아주 필사적으로 노출을 꺼려하던 배우임은 틀림없다. 아무도 그녀가 사석에서, 혹은 카페나 나이트 클럽 같은 곳에 나타난 걸 본 사람이 없다고 하니 필시 그녀의 사생활은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뭔가가 있던 게 분명하다.

 

 

가르보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녀의 고향에서도 수수께끼같은 존재였다. 매력적이고 감각적이며 이국적인 가르보는 또한 이상한 성격으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현재까지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레타 가르보의 출생 배경

 

그레타 가르보는 1905 9 18 오전 스웨덴 스톡홀름 초라한 5층 아파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환경미화원부터 공장 노동자 등을 전전하는 하층 노동자 계층 집안이었다. 그녀는 자녀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적에도 그녀는 이웃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혼자 집에 있는 것을 즐겼다. 보다 못한 엄마가 그녀를 야외로 데려가서 놀라고 하면 혼자서 구석을 헤매거나 홀로 따로 떨어져 있곤 하였다.

 

어릴 때부터 혼자있는 것을 좋아한 그레타 가르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을 때 그녀는 가장 괴로워했는데, 그녀가 싫어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것 때문이었다. 거기다 휴식 시간은 아이들과 어울려야 하는 상황 때문에 더욱 괴로워했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또래 중 키가 너무 큰 이유도 작용했다. 남녀 다 합해서 그녀가 제일 키가 컸고 12살 때 성인 키로 성장 한거다. 남들보다 성장이 빨랐던 만큼 정신적으도 조숙했던 것인지 가르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것은 이국에 대한 공부였다.  홀로 어딘가로 탈출하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던 모양이다. 

 

아버지 죽음 후 가세가 더 기울어진 그레타 가르보

 

 

그녀가 14살이 되었을 땐 키가 커서 슬픈 것 말고 삶에 있어서 진정한 비극이 발생하였는데 그녀가 너무나 사랑했던 아버지가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은 일이다. 또한, 아버지가 죽은 후 집안은 더욱 기울었다.

 

당시 그녀의 엄마와 언니들은 일을 하러 나갔지만 가르보는 아직 어린 소녀였기에 학교에 남아야 했다. 가르보는 스스로 돈 벌 궁리를 하다가 이발사들의 어시스트로 용돈 벌이를 한다. 벌이가 너무 적은 것 때문에 만족하지 못한 가르보는 13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엄마를 설득해 백화점에 지원하게 해달라고 설득했다.

 

 

십대에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하게 된 그레타 가르보

 

 

 

그렇게 1920년 스웨덴의 고급 백화점에서 모자 판매원으로 일하게 되었고,  모자 카탈로그 작업 배치를 돕다가 사진을 잘 찍고, 키가 크고 서툴지만 이상하게 매력적인 소녀를 영화판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모자를 사러오는 여배우드를 기다리는 일을 좋아하던 가르보가 배우의 길을 가게 되었을 때 가게에선 일 잘하는 그녀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배우가 되려한 그레타 가르보는 1922년에서 1924년까지 스웨덴 왕립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했다. 스웨덴은 무대에 서려면 반드시 이 학교를 거쳐가야 했기 때문이다. 

 

 

배우 학교 졸업 후 유럽에서 가장 잘 나가는 스타로 

 

 

그리고 졸업 1925년 무렵에는 유럽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배우 중 한명으로 입지를 굳혔다. 1925년 말에는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사하였고 1926년 국제적인 스타가 되었다. 스무 살의 가르보는 아직 영어를 할 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압도적인 매력의 스타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배우가 되고 첫 등장이 코미디 영화인 것 치고는 색다른 신비주의로 탈바꿈한 그레타 가르보는 스타일 면에서도 선구자적인 면모를 보였다. 보이프랜드 룩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매니시 룩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그레타 가르보는 넓은 주름 바지, 셔츠, 스웨터 등 오버 사이즈의 룩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심플하고 중성적인 패션 스타일을 선호한 그레타 가르보

 

 

평소 그녀는 자연스럽고 심플한 스타일을 선호해 남성복에 영감을 받았다. 플랫슈즈부터 터틀넥, 트렌치 코트, 폴로넥 스웨터는 그녀의 활동적이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성향이 패션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 마를린 디트리히, 오드리 햅번 모두 그레타 가르보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다. 그레타 가르보가 대단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이런 남다른 감각 아니 앞서가는 차원이 다른 감각의 소유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훗날 그레타 가르보가 동성애자라는 여러 정황이 있었지만, 실제 남자가 되고 싶었던 것인지, 남성처럼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스타일을 지향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고, 다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여배우치고는 상당히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모던 걸이었다는 점이다.

 

1930년대 후반 흥행과 관심에서 멀어진 그녀

 

 

스타일과 외모, 연기 모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압도적인 매력을 지닌 그레타 가르보도 세월을 이기지 못했는지 193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흥행과 관심이 떨어지면서 대중에게 멀어져 갔는데 그렇다고 그녀가 커다란 스캔들을 일으키거나 결혼을 하거나 하는 것도 없이 평생 결혼도 않고 아이도 가지지 않고 혼자 살았다.

 

 

물론 몇몇 남자들과 연애를 하기도 했고 동성애자로 알려진 마를린 디트리히와 연애를 한다는 설도 있었지만, 당시에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스타들이 만연했음에도 그런 건 세상밖에 쉽게 나돌지 않던 시절이었기에 훗날의 풍문으로 떠돌 뿐이다. 하지만 거의 확실시 되고 있는 것은 그녀가 양성애자 혹은 동성애자는 분명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무성애자였는지도 모르겠고. 1945년 이후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뉴욕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1984년에는 유방암 치료를 받았고 생이 끝날 무렵에는 신부전을 앓아 투석 치료를 받다가 1990년 84세의 나이에 신부전과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3천만 달러 이상의 재산을 남기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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