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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인문학)

[책맛보기]한국대중음악사 산책

by roo9 2020. 4. 30.

 

김형찬, 한국대중음악사 산책, 알마, 2015

 

 

한국 음반 제작의 역사

 

1887년 에디슨이 축음기 발명

1896년 미국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민요 취입

1907년 미국 콜롬비아사에서 경기 명창 한인오와 관기 최홍매가 민요. 가사. 시조 취입

해방 이후 최초로 음반사를 설립한 곳은 고려레코드

1947년경 부산에서 코로나레코드 설립

1948년 대구에서 오리엔트레코드 설립

어르신들이 나때는 말이야 하고 부심 부릴만도 하지...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0년대는 참혹한 생존의 시대였다. 청소년들은 한강 백사장에서 청춘을 향유했고, 가장들은 가족과 함께 창경원 꽃구경을 즐겼다. 서구식 의상이 유행했으며, 라디오가 도입되면서 대중매체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고. 조선의 지배자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해방과 더불어 삶의 기준과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의미였다. 전쟁으로 생계의 근거지를 상실한 음악인들은 우선 미군 기지에 설치된 클럽에서 개별적으로 음악 날품을 팔았다. 38.

미8군에 쇼무대를 공급하는 것은 1957년 미8군 내의 스페셜 서비스가 이 일을 담당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미8군 쇼단에 대한 심사는 엄격했다. 1년에 두 번 오디션이 있었다. 일 곱명의 심사위원들은 주한 미 문관들에서 차출된 사람들로 적어도 본국에서 음대를 졸업하거나 성악기, 현악기 등 전반적으로 음악을 통달한 실력자들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음악과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 많은 것을 요구했다. ...미군 부대에서의 보수는 후했다. 음악인으로 존중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의 대중음악인들은 모든 면에서 수준 높은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당대의 새로운 유행음악들을 본토 수준으로 연주해냈다. 그 대하고 후한 보수를 받았고 또한 음악인들로서 존중받았다. 대중음악인들은 미8군 무대에서 음악의 모든 것을 배우고 이후 새로운 스타로서 한국의 대중음악계에 데뷔하게 된다. 이인성. 이인표. 김희갑 등 대표적. 41.

동두천 기지촌 보산동이 특색있는 지역으로 거듭나고 있다.

음악인들의 마이너리그 기지촌 무대

 

심사에 떨어진 음악인들은 동두천의 브라보홀, 파주 장파리의 dmz, 왜관의 킹클럽 등 기지촌에서 활약했다. 서울 도심지 이태원은 가장 물 좋은 마이너리그로 특히 로포클럽은 도시 출신의 멋쟁이 사병들이 오는 곳이라 가장 최신곡으로 승부해야 했다. 43.

미8군 무대는 1963~1964년이 전성기였다. 1966년 베트남 파병으로 미군이 빠져나가면서 국내 무대는 쇠퇴하고 연예인들도 베트남으로 진출했다. 여기서 음악을 연마한 한국 음악인들이 훗날 일반 무대에 서면서 한국의 대중음악은 판도가 바뀌게 된다. 45.

 

1961년 kbs tv와 민영방송 mbc라디오가 개국하면서 생겨난 방송 무대에 미8군 쇼 출신 음악인들이 대거 등장했다. 최희준과 패티김으로 대표되는 스탠더드 팝이 새롭고 세련된 노래로 각광받았고 춤으로는 트위스트가 무대를 점령했으며 일부 마니아들은 재즈 음악에 탐닉했다. 젊은이들은 록 음악이라는 어른들이 따라올 수 없는 음악에 환호했다. 이후 한국대중음악계는 기존의 트로트.신민요라는 전통 스타일과 스탠더드팝이라는 미국 스타일의 대중음악이 나란히 발전하는 모습이다.

결과적으로 미8군 무대는 해방 이후 거의 모든 한국대중음악의 요람구실을 하게 된다.

2009년 한국대중음악계는 걸그룹 열풍이 지배했다.

 

음악학원에서 가수를 꿈꾸다.

 

1960년대 후반 당시 서울 시내에는 수십 군데의 음악학원이 있었다. 1956년 설립된 종로2가의 세기음악학원과 1967년 종로3가에 설립된 세광음악학원은 대규모 종합음악학원으로 명성을 누렸다. 이들은 기초반에서 기본적인 것을 배운 다음 연구반에 올라가 전문적인 창법이나 이론을 배운다. 그리고 나서 작곡가에게 개인지도를 받다가 곡을 받아 취입하고 가수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가수 등용문들 각각은 시대에 따라 부침을 달리했다. 미8군 무대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거의 사라졌고, 음반사 콩쿠르는 방송사의 신인 선발로 대체되었다. 작곡가들의 위세는 1980년대에 들어 여러 연예기획사들이 생겨나면서 줄어들었다. 음악학원의 숫자가 줄어드는 데 비례해 대학에 실용음악학과가 생기면서 대중음악교육이 대학으로 일부 넘어가는 현상도 생겼다. 음반사는 2000년대에 들어 음원시장에 자리를 내주고 몰락하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위성방송, 케이블 방송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방송 채널은 엄청나게 등장했지만 방송사는 대중음악시장에서 슈퍼 갑이 되어버려 더이상 신인 양성에 신경쓰지 않았다. 148.

 

1960년대는 대학생이 청년의 10퍼센트를 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대학생은 동네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자연히 대학생들의 문화는 최고 수준의 문화로 인식되었고 고교생때부터 일반 청년들까지의 문화를 이끌어나갔다. 한편 미국식 교육체계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대학사외는 미국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이는 축제 때 잘 드러났다. 1964년 한일수교를 계기로 민족문화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는 차원에서 전통문화가 대학가에 도입되기로 했다. 266.

 

1960년대 한국의 찻집(다방) 문화는 그 시대의 가장 앞서가는 문화를 수용하는 공간이 되거나, 또는 가장 적나라한 서민의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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