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umanities(인문학)/모든것의 역사

고종의 개화 정책 과정과 개항 이후 변화

by roo9 2021. 10. 27.

조선정부는 개항 직후 김기수를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했고 이어 1880년 6월에는 김홍집을 파견했다. 김홍집은 황준선이 쓴 조선 책략을 건네주었고 이를 받아들여 대외적 군세정책과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 책은 청이 조선을 속국화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조선 책략의 핵심

 

조선 책략의 핵심은 러시아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중국과 친교를 두텁게 하고 일본과 제휴를 하자는 내용이다.

 

 

 

고종은 척화비를 모두 없애며 개방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1881년 12월 의정부 밑에 청의 제도를 모방하여 통상과 문물 수용을 전담하는 통리기무아문을 새로 설치했다. 민겸호, 민영익, 어재연 등 고종 측근들을 참여시켰다.

 

 

 

 

1882년 미국과 통상조약

 

조선 정부는 1882년 4월과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듬해 영국과도 체결하였지만 불평등 조약인 최혜국대우까지 적용됨으로써 불평등 조약 체계가 완성되었다. 이어 프랑스, 독일, 러시다 등 서양 여러 나라와 수호 통상을 체결했다. 그러나 고종의 이러한 개화정책은 1882년 구식 군인들의 봉기와 청의 내정 간섭으로 진전이 쉽지 않았다.

 

 

(신식군대인 교련병대를 따로 설치한 후 근대식 군사 훈련을 시켰었음)

 

임오군란과 청의 간섭

 

 

1882년 8월 대우를 못 받은 구식군인들이 개화정책에 반발하여 봉기했다. 이 폭동은 반일 투쟁으로 발전했다. 고종은 대원군의 재집권으로 무마하려 했고 개화정책은 중단을 가져왔다. 봉기는 결국 청의 간섭으로 진압되었다. 청은 이를 기회로 종래의 사대관계를 내세워 조선을 속국화한 조청상민수룩 무역장정을 강제로 맺고 내정간섭을 강화했다. 일본도 이 사건을 구실로 제물포 조약 및 수호조규속약을 맺었다. 군인봉기 이후 청의 속국이 된 조선은 청과는 종래의 조공체제를 유지하는 이중적 국제질서에 놓이게 된다.

 

 

 

 

 

갑신정변

 

청의 내정간섭은 심하고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민씨 척족들은 개화정책에 소극적이었다. 통도서기론적인 개화파(온건파)는 민씨 척족과 손을 잡고 청의 양무운동을 점진적으로 추진하려 하였으나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는 이에 불안을 느끼고 개화를 더욱 서둘렀다. 이들은 미국 등을 대상으로 차관 교섭을 벌이고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 한성순보를 발행하며 서울의 도로 정비 등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뮐렌도르프는 위안스카이가 데려와 공조 참판에 앉힌 최초의 외국인이었다. 그와 김옥균은 바닥난 국가 재정을 충원하는 방법을 두고 대립하였다. 김옥균은 차관을 들여와 해결할 것을 주장했고 뮐렌도르프는 당오전 발행을 주장했다. 김옥균의 차관교섭이 실패하면서 급진 개혁파는 곤경에 처한다.

 

 

 

 

 

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나 청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김옥균 패는 정변을 준비한다. 일본은 정변을 돕겠다고 나섰다. 이들은 자체 무장력과 일본군을 동원하여 민씨 일파를 단숨에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개화파는 10월 19일 14개조 정강을 발포했다. 경제적으로는 지조법을 개정하고 재정기관을 일원화하여 개항뒤 보부상의 독점권을 보장한 혜상공국을 폐지하여 자유로운 상업 발전을 꾀하려 했다. 인민평등권과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등 참신했지만 정변은 3일 만에 끝났다. 10월 19일 청이 공격해오자 일본이 철수해버렸다. 갑신정변은 일본의 침략 속셈을 내다보지 못한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개항이후 변화하는 조선사회

 

개항 뒤 쏟아져나온 서양 문물은 사회와 경제 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전신이었다. 석유와 성냥도 들어와 부싯돌을 대신했고 1887년 경복궁 안 건정전에는 도깨비불로 통하던 전기불이 들어왔다. 그러나 서구열강에게 최혜국대우 조항이 허용됨으로써 사실상 외국인에게 내륙시장까지 개방되었다. 서울을 비롯한 조선의 시장은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외국 상인에게 지배되었고 큰 타격을 입었다. 수입품은 70%정도가 면이었고 이들은 곡물과 금을 헐값으로 사가 큰 이익을 남겼다. 쌀 수출은 상품화를 촉지시켰으나 민중의 생활이 한층 얿게 되어 방곡령을 실시했으나 일본의 항의와 방해로 번번이 실패했다. 조선과 일본의 무역체계는 차츰 미면교환체제로 바뀌어 갔다. 식민지 무역과 비슷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