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과 영국은 소련과 유럽의 미래에 대해 장기적인 의견 차이를 보였는데, 소련의 대부분은 나치의 공동 노력으로 나치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각자는 그곳에 자국의 이익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고 싶어했다.
냉전의 시대
러시아는 지난 40년 동안 두 차례 침략을 당했고 미국은 두 차례나 유럽 전쟁에 끌려갔다. 각각은 그것의 시스템이 그것의 안전을 가장 잘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리고 각각은 그것이 생각이 가장 많은 자유, 평등, 번영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이 의견충돌로 인해 이 시기를 냉전의 시대라고 불렸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많은 제국이 멸망했고, 많은 내전이 일어났다. 미국은 안정, 민주주의, 개방적인 무역을 원했다. 전후 경제 약화가 공산주의의 인기를 높일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미국은 소련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에게 전쟁 피해를 복구하고 그들의 경제를 돕기 위해 거액의 돈을 제공했다.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1952년까지, 서유럽 재건을 위한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은 133억 달러를 투자했다.
소련과 중국 공산주의
소련군은 중앙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에 공산주의 정부를 강요했다. 미국은 소련의 확장을 제한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북부 이란에서 소련의 철수를 요구했다. 미국은 터키를 지지했고 그리스가 공산 반군에 맞서 싸우는 것을 도왔다.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했을 때, 미국의 공수부대는 이 분단된 도시에 수백만 톤의 물자를 가져왔다.
1949년에 마오쩌둥의 공산군이 중국을 장악했다. 북한은 1950년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남한을 침공했다. 미국은 군사 개입에 대한 유엔의 지원을 받았고, 1953년까지 유혈전쟁이 계속되었다. 비록 마침내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미군은 오늘날까지 한국에 남아 있다.
1960년대에 미국은 남베트남이 공산주의 국가인 북베트남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을 도왔다. 모든 미국 군대는 1973년까지 철수했다. 1975년에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정복했다. 그 전쟁은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베트남의 많은 "보트 피플"들은 그들의 나라의 새로운 공산주의 통치자들로부터 도망쳤다. 미국인들은 전쟁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고 다른 외국 분쟁에 휘말리기를 열망하지 않았다.
이념 전쟁 중 미국 내부는 흑백 갈등 중
세계 정세는 이러했지만 미국 본토는 안락함을 추구했다. 순응과 소비가 미덕이 되었고 급증하는 물가 및 이주민들을 피해 도시에서 더 큰 집을 살 수 있는 외곽 지역으로 이사하는 일도 유행처럼 번졌다. 그리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공정한 대우를 받기 위한 저항 운동을 시작했다.
1954년 대법원은 흑인 아동들을 위한 분리된 학교들이 백인 아동들을 위한 학교들과 같지 않고 통합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존슨 대통령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지지하여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위한 시민권과 투표권을 위한 평화적인 투쟁을 벌였다.
말콤 엑스와 같은 일부 흑인 지도자들은 개혁을 위한 덜 평화적인 방법을 믿었다. 새로운 법률은 분리를 종식시켰고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보장했다. 많은 흑인들이 보다 부유한 중산층에 합류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종적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자유롭고 잘 살 수 있는 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1960년대 페미니스트 운동 확산
1960년대와 1970년대 동안, 많은 미국 여성들은 그들이 남성과 같은 기회를 갖지 못한 것에 분개했고 페미니스트 운동이 확산한다. 여성 평등권을 약속하는 개헌안은 충분한 주들이 비준하지 못하자 실패했지만, 많은 새로운 법률들이 평등권을 부여했다.
미국에 여성 인권과 흑인 문제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 인디안 원주민들은 정부가 과거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들은 부족 땅과 물에 대한 권리를 되찾았다. 그들은 주택과 교육을 위한 원조를 위해 싸웠다. 1992년, 벤 나이트호스 캠벨은 상원의원으로 선출된 최초의 미국 원주민이 되었다. 멕시코, 중앙 아메리카, 푸에르토리코, 쿠바에서 온 히스패닉 미국인들도 정치적으로 활동적이었다. 그들은 차별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들은 지방, 주, 그리고 국가의 직위에 선출되었다.
히피 열풍이 불면서 대학생들은 베트남 전쟁에 항의했고, 존슨 대통령은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긴 머리, 락앤롤 음악, 불법 마약은 이 시기에 몇몇 젊은이들을 생각하는 "반문화"의 눈에 보이는 상징이었다.
그리고 미국 사회는 천천히 변화하고 있었다. 이제 미국은 완연한, 다문화 인구를 포용하고 있는 사회가 된 것처럼 보인다. 미국은 항상 법과 사회 변화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서로 다른 생각과 관점이 경쟁하는 곳이었다. 그러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자유주의적 활동은 1980년대에 보수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레이건 대통령
보수주의자들은 제한된 정부, 강력한 국방, 그리고 감세를 원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지지자들은 그의 정책이 소련의 붕괴와 냉전의 종말을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1992년 미국인들은 보다 진보적인 빌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2000년 선거가 임박했을 때 정치는 평소보다 더 씁쓸해졌다. 플로리다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투표용지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조지 W. 부시가 앨 고어를 누르고 선거에서 승리했음을 알렸다.
2001년 9월 11일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은 교육, 미국 경제, 사회 안보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기대했다. 2001년 9월 11일, 모든 것이 바뀌었다. 외국 테러리스트들은 뉴욕의 두 개의 세계 무역 센터 타워, 워싱턴 D.C.의 펜타곤 그리고 펜실베이니아의 시골 들판에 네 대의 여객기를 추락시켰다. 부시는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미군을 파병했다. 처음에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부시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점차 많은 사람들은 부시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 불편해 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
2008년 미국인들은 버락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오바마는 미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되었다. 그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난에 직면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그리고 극단적인 평이 오가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일이 생겼고 현재는 고인물 바이든이 젊은 미국을 통치하고 있다. 트럼프와 바이든에 대한 평가는 조금 미뤄두는 게 좋을 것 같고... 미국의 3억 명 인구는 세계의 거의 모든 민족과 민족을 대표한다. 경제, 기술, 문화, 사회 분야에서 발전은 계속되고 있다. 미국인들은 상호의존적이고 상호 연결된 세계에 살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초기 가치관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 중에는 개인의 자유와 민주 정부에 대한 신념과 모든 사람들에게 경제적 기회와 진보에 대한 약속도 포함되어 있다. 미국을 위한 일은 자유, 민주주의, 기회의 가치를 21세기에 안전하고 중요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Humanities(인문학) > 모든것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대 문명의 발상지 강가에서 벌어진 일 (0) | 2021.11.07 |
---|---|
인류 역사의 시작 (0) | 2021.11.06 |
고종의 개화 정책 과정과 개항 이후 변화 (0) | 2021.10.27 |
북유럽 신화 이그드라실에 관하여 (0) | 2021.09.13 |
1930년대 전후 미국 경제와 세계대전에 관한 스토리 (0) | 2021.09.11 |
미국사 남북전쟁 이후 발명의 시대 이야기(1800년대 후반) (0) | 2021.09.10 |
미국사 남북전쟁 스토리 (0) | 2021.09.08 |
미국의 헌법과 국가의 탄생 과정 (0) | 2021.09.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