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발전 과정에 관해 알아보자.
고구려의 발전
광개토왕은 즉위 이후 대대적인 정복 사업을 벌였다. 고구려는 왕을 높여 태왕이라 칭하고 고구려 중심의 천하라는 독자적 세계관을 수립하였다. 광개토왕은 영락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하였다. 불교를 새로운 이념과 종교로 내세우고 평양을 새로운 수도로 건설하고자 하였다.
장수왕은 79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고구려를 안정시켰다.427년 평양 천도를 관철하고 남진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때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433년 나제 동맹을 맺었다.
6세기 중반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귀족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고 실권자인 대대로를 선임하는 귀족 연립 체제를 형성하였다. 왕의 권한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백제의 중흥
5세기 초에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백제는 큰 위기를 맞는다.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 475년 장수왕이 3만을 끌고 백제를 공격해오자 신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신라가 도착하기 전에 백제는 크게 패하여 수도 한성은 함락되었고 개로왕도 전사하였다.
백제는 급히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
동성왕이 귀족들에 의해 살해된 후, 무령왕이 일본에서 돌아와 즉위하였다. 무령왕은 지방에 22개 담로를 두고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왕권 강화와 국가 재정을 탄탄히 한 후 한강 유역 회복을 위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중국 남조의 양이나 일본과도 교류를 활발히 하였다.
성왕은 538년 수도를 다시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다. 중흥을 꾀한 성왕은 중앙에 22부를 두고 지방에는 5부, 5방을 설치했다. 불교를 크게 일으켜 사상적 통합을 꾀하였다. 왜에 불교를 전해주기도 했다.
또한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 했고 함께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회복하였다. 그런데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을 기습하여 백제가 차지한 땅까지 빼앗아 버렸다. 신라의 배신에 격분한 성왕은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죽는다. 그 뒤로 백제는 신라를 줄기차게 공격하였다.
뒤통수는 신라가 먼저 친 거였구먼...
신라의 팽창
6세기에 신라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지증왕은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왕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었다. 지증왕은 순장을 금지하고 우경을 장려하며 경작지를 널리 개간하도록 하였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병부를 두어 병권을 통괄하고 귀족의 대표로 상대등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불교를 공인하였다.
진흥왕은 국사를 편찬하게 하여 왕실 권위를 높이고 개국 이라는 독자적 연호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황룡사를 창건하였다.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영토를 확장하였고 정복한 지역 다섯 곳에 순수비를 세워 신라의 영토 임을 표시했다.
삼국의 각축
5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는 남북조 나라들 및 유연과 관계를 맺으며 한편으로느 ㄴ견제하는 다각적 외교정책을 펼쳤다. 고구려는 다양한 문물을 수용하여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를 이룩했다.
6세기 중엽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은 후 고구려는 서쪽 북제의 군사적, 외교적 압박을 받게 된다. 등등 안팎의 위기 속에서 내분을 수습하며 귀족 연립 체제를 이루고 신라와는 밀약을 맺었다.
533년 신라은 백제 점령지를 기습하여 한강 일대를 모두 차지하였다. 이것으로 100년간 나제 동맹이 깨지고 백제와 신라의 세력 관계는 역전되었다.
수가 중국을 통일한 후 주변 강대국으로 등장한 수의 눈치를 보느라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와 외교 교섭에 나섰다. 수는 고구려의 독자적 세력권을 부정하고 고구려에 복속할 것을 요구했다. 고구려는 수와 외교 관계를 끊고 전쟁에 대비했다.
수 문제는 고구려 정벌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한다. 여기에 을지문덕의 큰 공이 있었다. 수의 뒤를 이은 당이 등장하엿고 당은 처음에는 고구려의 세력권을 인정하고 온건 정책을 취했다. 고구려는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16년에 걸쳐 천리장성을 쌓았다. 그 사이 분열이 일어나 공사 감독을 맡던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과 귀족들을 죽였다. 보장왕을 보위해 올리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전권을 장악하였다.
645년 당은 연개소문을 단죄하겠다는 명문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실패하자 다시 안시성으로 쳐들어왔다.
안시성은 포위되었지만 무너지지 않았고 당은 그 뒤로 전략을 바꾸어 고구려 군대와 국력을 소모시키는 지구전을 벌였다.
삼국의 지배체제
고구려
왕 밑에 상가 등 10관등을 두었다 후에 관등 조직을 더욱 정비하여 14 관등 체제를 갖추었다.
백제
6좌평과 16 관등의 중앙 통치 조직을 갖추었다. 전국을 5방으로 나누고 지방의 주요 지역에는 담로 22명을 파견하였다.
신라
귀족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중앙의 지배층은 17 관등으로 구분하고 지방 지배세력에게는 따로 지위를 주었다. 지방은 주나 군으로 재편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지방민을 지배했다.
신분제
신분제를 바탕으로 중앙 정치 조직과 지방 지배 체제를 정비한 삼국은 국가를 운영하는 기본 법제로 율령을 마련하였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보면 왕이나 귀족은 크게 그려져 있고 노비나 낮은 신분의 인물은 작게 그려진 것으로 보아 유추.
백제의 신분제도는 관등 체계에 반영되어 있다.
크게 3등급으로 나뉘고 제1 관등은 솔, 제2관등은 덕, 제 3관등은 무관 계열이었다.
관등에 따라 복색도 자색, 비색, 청색으로 구분되었다.
신라는 골과 품으로 귀족의 신분을 나누었다.
왕족과 최고 귀족은 성골이나 진골에 속했고 일반 귀족들은 6두품 이하 각 두품에 속했다. 3두품 이하는 점차 일반 평민,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진골뿐이었다.
수취와 민
소위 생산에 가담하여 종사를 짓는 면 중에 경제적으로 부유한 읍락의 유력자들을 호민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하호를 노비처럼 부렸다. 삼국 건국의 주체 세력이 된 제가 들은 국가에서 읍락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4세기 이후 철기가 보편화되면서 쟁기 농사가 보급되면서 수확량이 크게 늘었다. 수리 시설도 늘었고 이러한 생산력의 발전에 힘입어 삼국은 정복 전재을 더욱 빈번하게 벌이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어 갔다. 읍락의 면은 율령제에 의해 법의 보호를 받는 공민이 되었다. 공민은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삼국은 모두 초기부터 농업을 장려하고 민을 보호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민은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다.
삼국의 문화
불교의 공인
삼국 초기에는 천신 신앙이었다가 체제를 정비하는 단계에서 새로운 종교 사상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불교와 유교, 도교 등 새로운 종료 사상을 받아들였다. 고구려는 372년 소수림왕, 백제는 384년 침류왕 신라는 527년 법흥왕에 공인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처음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부리교는 모든 현상을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가 있다는 인과의 논리로 설명해 낸 새로운 사상이자 종교였다. 또한, 이상적 군주 전륜성왕이 출현한다는 교설이 있어 고대국가의 정복 전쟁을 뒷받침해주었다.
삼국의 불교는 왕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 지배 질서를 갖추어가는 고대국가의 발전과 왕권의 확립을 정당화해 주었다. 그리고 불교의 윤회설은 현실의 불평등한 질서와 신분제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었다.
유학과 도교 풍류도
유학도
고대국가의 발전을 뒷받침한 사상이었다. 삼국 시대는 사회 윤리로 충성과 신의가 강조되었다. 아울러 유학 교육이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4세기 후반 소수림왕 때 태학을 세웠고 벽제도 오경박사를 임명하여 유교 경전을 교육했다. 신라의 경우 6세기 진흥왕 순수비의 비문에서 유교사상을 엿볼 수 있다.
도교
도교는 중국 민간의 신선 사상과 오행설 등이 결합되어 종교로 발전한 것. 고구려는 7세기에 당과 국교를 맺은 후 도교를 장려하기도...
백제는 신선 세계를 표현한 벽돌이나 금동대향로에 새겨진 봉래산과 신선의 모습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신라에는 풍류도 또는 풍월도라는 고유의 사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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