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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인문학)

파스칼 키냐르의 로마의 테라스

by roo9 2021. 10. 27.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구석에서 살아가는 법일세.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모두 구석에서 살아가지. 책을 읽는 사람도 구석에서 사는 거네. 절망한 자들은 숨을 죽이고, 누구에게 말을 하거나 누구의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마치 벽에 그려진 사람처럼 공간에 달라붙어 살아가는 거야. 

 

이 젊은 여자는 통 말을 하지 않는다. 1939년 봄, 여자의 나이 열여덟이다.

 

누구나 어둠의 편린을 쫓다가 어둠에 빠져 들어요.

 

포도알은 부풀다가 터지구요. 

초여름에 자두는 모두 벌어지고 말아요.

유년기가 끝날 때 어떤 남자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정원에서

침실에서 두 번

철제 갓이 달린 초롱으로 밝힌 지하실에서.

낡은 기와 제조소에서.

다랑방에서는 여섯 번.

반찬 가게에서.

빌린 작은 배에서.

 

서로 포개져 있던 연인들은 느닷없이 쏟아져내리는 유리 파편들로 뒤덮인다.

 

 

어제는 당신이 골목을 내려와 사부님의 가게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구요. 당신은 흉측해졌더군요.

 

나는 그가 당신을 죽이길 바랬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정말 보기 흉하게 변했어요.

 

난들 어쩌겠어요.

당신 자신의 모습을 모르는 게 분명해요.

어서 이곳을 떠나요.

 

그는  재앙을 기회로 삼았다. 모습을 바꿔 도둑질을 하기 시작했다.

 

 

1년 후 그는 그녀를 보았다. 막 오후로 접어들 무렵이다.

 

아이를 낳았어요. 누구의 아이?

 

그는 도망갔다.

솟아 있는 절벽 위에서 2년을 살았다.

 

마흔 살의 몸므는 자신에게 엑스터시를 불어일으키는 여덟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꿈.추억…

 

질료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하늘이야. 하늘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생명이지. 생명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자연이고. 그러면 자연은 자라서 각양각색이 형태들로 모습을 드러내네.

 

이 세상 특유의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게 있거든. 그것은 대체로 꿈이라네.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그늘은 그의 산책 코스를 결정했다.

 

이유를 대는 것은 삶을 황폐하게 만드오. 사랑하는 대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거짓에 불과하지.

인간은 살아 있다는 감각이 절정에 달했을 때의 느낌에만 기뻐하기 때문이라오.

또 다른 삶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는 자유로움과 살아있다는 행복에 흠뻑 취해 있다. 포도주와 몽상의 사이에서.

 

이 세상에는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점들이 존재하오. 이런 공간들은 옛날이 굳어진 순간들이지. 모든 것이 먼 옛날의 열정을 지니고 그리로 집결한다오. 그것은 하느님의 얼굴이오. 

 

사람은 늙어갈수록, 자신이 통과하는 풍경의 광채에서 몸을 빼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네. 바람과 세월에 닿고, 피로와 기쁨에 탄력 읽은 살갗, 갖가지 체모, 눈물, 땀방울, 손톱과 머리카락, 이런 것들이 마치 낙엽이나 죽은 나뭇가지처럼 땅에 떨어져, 두툼한 살갗 외부로 점점 더 빈번히 빠져나가는 영혼을 흩어지게 하지. 마지막 떠남은 사실상 흩어짐에 불과해. 늙어갈수록 나는 내가 도처에 있음을 느끼네. 이제 내 육체 속에는 내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나는 언젠가 죽는 다는 것이 두렵네. 내 살갗이 지나치게 얇아졌고, 구멍이 더 많이 생겼다고 느끼지. 난 혼자 중얼거리네. 언젠가 풍경이 나를 통과하겠지….

 

그곳으로 나를 이끈 건 욕망이 아니라 호기심이었어요.

 

불행한 사람들은 부모들의 분노, 뒤이은 쾌락도 그들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분노의 산물이다.

분노는 유채식의 기피를 의미한다 .로마인 모뮈스는 유채색을 거부한 화가였다. 어둠과 분노는 동일한 단어이다. 신과 복수가 하느님의 유일한 행위를 구성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질투심이 상상보다 먼저야. 질투심은 시선보다 더 강렬한 환영이지.

 

어떤 나이가 되면, 인간은 삶이 아닌 시간과 대면하네. 삶이 영위되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지. 삶은 산 채로 집어삼키는 시간만 보이는 걸세.

 

내게는 한 이미지를 몽상할 시간, 아니 눈앞에 붙잡아놓고 재생시킬 시간이 더 이상 없다. 

 

선악과 이후로 인간을 파멸로 몰아간 것은 과다한 겉치레와 색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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