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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인문학)/모든것의 역사

한국사 조선전기 대외관계 보기

by roo9 2021. 9. 1.

조선전기 대외 관계

 

대명외교-사대 외교, 명을 제외한 다른 곳은 친하게 지낸다. 교린정책.

태조 이성계때는 요동정벌 때문에 명과 관계 험악했음. 왕자의 난 이후 관계 호전.명이 망할 때까지 250년까지 명에 대해 사대를 함. 이유는 정권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자주 실리라고 하지만 ... 이러저러한 이유로 사대 관계 유지.

 

 

여진과의 관계-전형적인 화전 양명책. 여진 추장 중에서 귀순한 자들에게 가옥이나 토지. 벼슬도 줌. 국경일대에 무역소 설치. 무역소는 태종 때 설치.북평관은 여진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곳.

강경책은 만주에 있는 여진 사회는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음. 조선과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부족도 있었다. 노략질 일삼는...태종 때부터 세종, 성종 등 여러차례 조선군을 보내 두만강 압록강 너머 만주까지 조선군이 올라가서 토벌한 적이 있음. 세종 때 최윤덕 장군 보내 압록강 중류 지역에 보내 4군 설치. 김종서 장군을 보내 두만강 하류 지역에 6진 설치. 이게 4군과 6. 여기 군대만 주군하면 여기 못 지킨다는 생각에 하삼도 지역에서 사람들 수천호를 이주를 시킴. 북방 사민 정책. 사민정책을 보완하기 위해 말단 관직인 토관은 함경도 인을 임명. 이게 토관제도.

 

 

 

일본과의 관계: 고려말 조선 초에 왜구 문제가 극성. 조선초까지도 문제.

강경책:세종 1년 이종무 장군에게 전함 보내 왜구 본거지 대마도 공격함. 당시 대마도주로부터 왜구 지원 근절하겠다는 약속 받고 철수 1571년 대마도 정벌.

 

 

회유책: 이들이 교역이 여의치 않으니까 해안가를 노략질한다고 봐서 합법적으로 교역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 줌. 부산포, 염포, 제포, 삼포를 세종 때 열었다. 삼포에 왜인들이 드나들 수 있는 왜인선 수는 50, 살 수 있는 쌀과 콩은 일년에 이백섬으로 정함 이것이 계해약조(1443), 이후 이렇다 할 문제가 없었지만 16세기가 되면서 조선 정부가 교역을 통제하고 있으니까 왜인들이 난동을 부림. 이게 중종때 있었던 삼포의 난. 3포 왜란(중종 1510), 이후 2년 뒤 임신약조(제포만 남기고 나머지는 닫고, 세견선 25, 세사미도 100석으로 줄임)- 1555년 명종때 제 2차 왜구의 시대, 전라도 해안가 노략질한 사건 을묘 왜변. 이후 비변사가 상설화됨.

 

 

명과의 외교 갈등:표전시비, 종계 변무.

표전시비는, 표전은 외교문서를 뜻함, 명나라 조정에서 외교 문서 꼬투리 잡고 압송 어쩌구 저쩌구..

종계 변무는 조선의 창업 군주 이성계가 이자춘의 아들인데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명나라 애들이 잘못 기록해서 고쳐 달라고 여러 차례 사신을 보냈는데 안 고쳐 주고 이백 년이 지나서 고쳐 줌. 이게 종계 변무.

 

 

해동제국기(신숙주)

세종때 일본으로 사신이 감. 서장관이라 함. 과거의 높은 성적으로 합격한 최고의 엘리트가 서장관으로 따라감. 당시 신숙주가 따라가서 보고 들은 것 기록하고 퇴직 후 성종 때 기행문 형식으로 쓴게 해동제국기.

 

 

류큐와의 교류: 조선 초에 중국이나 일본, 여진하고만 관계가 있던 건 아니다. 류큐(에도, 지금의 오키나와),, 루숨 (필리핀) 자완(인도네시아) 시암(태국) 등에서 조선에 여러차례 조공사절이 다녀감. 대표적인 게 류큐사절. 15세기에 여러차례 드나듬. 이들에 의해서 불경, 유교 경전, 범종, 부채 등을 받아서 감.

 

국경선 지도 찾기.

두만강과 압록강 국경 만들어진게 세종 때.

압록강 중류 초산부터 길주 갑주까지가 고려 말 조선초의 국경선. 공민왕 때 잃어버린 영토 회복하기 위해서....

압록강 하류부터 도련포까지가 천리장성.

청천강부터 연흥만까지가 고려 초 태조 왕건 국경선.

대동강부터 원산만까지가 통일 신라 국경선.

 

 

대외관계

 

1510년 중종 때 있던 삼포의 난 이후 비변사 설치. 을묘왜변 이후 비변사 상설 그렇게 장기평화 계속되던 중 국방력 약화.

당시 일본 열도는 중대한 변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열도 통일. 1591년 임진왜란 일어나기 한 해 전 일본에 사신을 보냄. 황윤길 정사, 김서유 부사. 이 두 사람이 이야기가 다름. 황윤길은 대일경계론, 김서유는 대일안심론. 조선은 알면서도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음.

마침내 159141320만군의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한나절도 버티지 못함. 동래성(요충지) 함락,

봉화대가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415일 낮에는 선조가 전란 소식을 들었을 것. 선조의 사위 부마였던 신립 장군을 보내 북상을 막게 했음.

 

 

 그런데 문경세재를 닫아야 하는데 이걸 열어두고 충주 탕금대 벌판에서 평야를 벌이다가 몰살 당함. 신립 장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조는 피난길에 오름.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도망감. 그리고 명나라에 원병을 청함.

서너달 동안은 관군이 속수무책으로 붕괴. 그나마 지방곳곳에서 일어난 의병이 잘 버텨줬고. 이순신의 역할이 컸음.

경상도 대표 의병장군 홍이장군 곽재우, 전라도 대표 의병장군 김천일이나 고경명, 충청도 대표 의병장군은 조헌. 함경도 길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정문부.

  가등청정 부대는 함경도 일대 휩쓸고 있었는데 그를 막아내는데 큰 공이 정문부, 나중에 숙종때 함경도 도민들이 정문부를 위해 북간대첩비를 세워 줌. 백 년만에 돌려 받아 북한에 돌려줌. 승려의 활약도 두드러짐 삼양당 대사와 서산 대사.

 

 

남해한 일대에서 수군을 이끌고 일본군을 이끈 이순신의 활약. 이순신의 해전

2323승 중 한산도 대첩, 1597년 정유재란에 있던 명랑 대첩.

 

 

 

학 날개처럼 적의 전함을 감싸서 87척 중 오십 몇 척을 박살낸 한산도 대첩.

 

 

 

 

일본의 주요 목표는 명나라, 주포는 수군이 아닌 육군이었음. 수군이 보급 병참을 싣고 함께 병진한다는 전쟁 구상이었음. 육군은 목표 초과 달성해서 의주 바로 밑까지 올라감. 그러나 군량미 가지고 함께 올라가야 하는 수군은 이순신 때문에 격파당해서 올라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음. 때문에 한산도 대첩은 일본의 기본 구상을 저지시켰음. 또한, 전라도 곡창 지대를 보호한 것도 의미. 이게 한산도 대첩.

 

 

의주로 피난한 선조는 명나라에 원병을 청해 5만명 지원 받음 15931월에 조.명 연합군이 평양 탈환, 이게 반격 시작, 이 한 달전에 있던 것이 행주 대첩, 한산도 대첩, 행주 대첩, 진주성 싸움은 임진 왜란 3대 대첩 중 하나.

 

이후 전쟁이 소각 국면. 일본은 조선을 배제한 채 명과 4년 동안 강화회담 개최. 결렬 되면서 1591년 초에 일본이 다시 조선 침공이 정유재란, 이때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7천량에서 조선수군을 모두 까먹고 이순신이 복직하고 12척으로 박살 낸 게 명랑 해전.

 

 

마침내 전쟁을 일으킨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일제히 철수. 철수하는 과정에서 마지막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는데 노량해전. 조명연합에서 이순신은 전사.

 

임진 전쟁은 동아시아 국제 전쟁 시각. 일본, , 여진 , 조선 등 관련이 되어 있고 영향을 준 국제 전쟁으로 보고 있다. 전쟁의 무대였던 조선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조선 인구 격감 전쟁 전 약 800, 전란 이후 500. 귀무덤, 코 무덤, 십수만명 이상이 일본 포로로 끌려가고 전란통에 양안, 토지 대장 인구 대장이 모두 불타버리면서 파악이 안 됨. 국가 재정 크게 악화-재정에 협력하는 자들에게 공명첩이나 납속책 만드는데 남발되어 신분제도 또한 혼란.

불국사 불타고, 경복궁 및 여러 궁 불타고 , 조선왕조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가 전주사고를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림.

전란을 거치면서 비변사 기능이 크게 강화됨. 조선 후기는 비변사가 최고 정무 기구로 발전. 강화회담 진행되고 있을 때 훈련도감 창설, 소급법

훈련도감은 왜군의 조총병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군 편제를 바꾼 것. -임진 전쟁 중 1594년에 창설,

 

                                   <이삼평 도공>

 

임진 전쟁 중에 명은 5만명 보내 도와줌. 목표는 조공국 보호, 하지만 진짜 목적은 베이징 울타리 랴우뚱을 보호하기 위함. 그러나 명나라 군이 7년동안 780만냥이란 엄청난 재정을 소비. 조선에서 일어난 전쟁 때문에 조선에 와서 마구잡이로 조세를 걷어가기 시작함. 이래서 농민 반란 일어나고. 명나라 멸망 원인이 이자성의 난(농민 반란)

 

 

국력 쇠퇴-여진족의 성장을 가져옴. 이들이 나중에 후금 세워서 명이 망하자 중국 지배 확립하기 시작. 명청 교체의 시작은 임진 전쟁.

일본에도 많은 변화가 옴. 히데요시는 전쟁통에 죽고 도쿠가와 이야스가 지금의 도쿄에서 정권 창조. 전란 통에 십수만 포로를 일본으로 끌고감. 도공, 활자공, 성리학자 등이 끌려가 에도 막부 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함. 이삼평 도공과 그 후손들에 의해 만들어진 아리타 자기가 최고로 꼽힘. 강황선생은 이황의 제자, 정유재란 때 끌려가 4년 동안 포로로 가서 후지아라 세이카를 가르침. 이게 일본 성리학의 시조임. 강황선생이 일본에 간 건 임진 전쟁과 관련.

 

 

 

왜란의 영향

 

대일 국교 재개와 통신사 파견.

전쟁 후 10년도 안 되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함. 여진족이 내려오고 있는 상황이어서 서둘러 일본과 교류를 했던 것. 최선의 명분. 도쿠가와 이야스 정권이었기에 그나마 위안을 삼음. 도쿠가와 이야스는 국교를 희망. 조선은 3가지 선결과제 희망. 먼저 국교 재개를 원하는 국사를 보내라, 왕릉을 도굴한 사람을 찾아가, 포로를 찾아라. 이에 에도 막부가 어느 정도 성의를 보였기에 1607년에 부산의 두모포에 왜관 설치.

기유약조 체결(1609)

 

조선통신사 파견: 일본의 왕 텐노는 빈껍데기 제사장. 에도에 있는 막부에 일본의 무가 정권에 최고 정권자는 쇼군.쇼군이 사실상 군주. 아들에게 쇼군직을 습직. 쇼군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습직을 축하하는 축하사절단을 보여달라고 하는데 조선에서 축하사절단을 대교모로 건너감. 이를 조선통신사라고 함.

 

 

15세기 세종 11419 계유약조

삼포왜란 직후 임신약조

중간에 을묘왜변에 양국 관계 잠시 중단.

기유약조는 부산포만 개항, 세견선 20, 세사미두 100,

 

 

14대 군주는 선조, 선조 뒤는 15대 군주 광해군, 광해군 엄마는 공빈김씨 후궁.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는 신분, 평양에서 세자 책봉을 받고 조정을 분조를 해서 전란 때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 광해군. 선조가 늘그막에 인목왕후와 결혼함.(정비) 여기서 영창대군을 낳음. 선조 죽었을 때 영창대군은 3.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이 왕이 됨. 광해군은 준비된 왕. 세자 자리만 15년 있었음. 선조 때 사림 안에서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지고, 광해군은 북인 정권, 광해군 쪽이 대북파, 영창대군이 소북파. 북인정권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래서 중립외교가 가능했던 것.

 

 

 

명은 조선에게 후금 공격한다고 3만명 보내라고 명령. 광해군은 그러자니 후금의 보복이 두렵고, 명을 저버리자니 의리를 저버리는 것 같아(숙명사대의식) 성리학자들은 조선의 사대부 걱정함.

그래서 명에게 지원병을 15천명으로 줄이고,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음. 광해군은 강홍립을 보고 정세를 보고 향배를 정하라고 . 강홍립은 명나라가 누르아치 군대에게 박살난 것을 보고 누르아치에게 투항하고 스스로 포로가 되어 관계 조율함. 명나라와 후금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침 이게 중립외교?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서인들의 반정의 중요한 명분 중의 하나였음.

명에 대한 은혜를 저버렸다고..

1623년에 인조 반정으로 제주도로 유배가서 쓸쓸히 죽음을 맞게 됨.

 

16대 군주 인조가 등장. 인조는 서인정권. 서인들은 율곡의 주류 성리학을 계승하고 있는 정통 주자학. 친명배청 정책 추진. 이게 두 차례 호란의 원인.

1627년 정묘 전쟁, 후금군 3만명이 조선 침공, 황해도 방면에서 전선이 교차되자 조선과 형제맹략을 맺고 후금은 철수 이걸 뒤통수 깐게 정봉수정도.

 

정묘호란의 원인은 친명배금 정책과 이괄의 난과 관련, 가도 사건과 관련.

이괄의 난과의 관련성은 인조반정 당시 이괄은 무장, 이괄은 반정의 공이 많았음. 반정군을 잠시나마 지휘권을 갖고 활약, 이등공신으로 밀려나고 평안공의 부원수가 됨. 이괄의 아들이 역모사건에 주범이 되자 이괄은 난을 일으킴. 이괄의 반란군이 한양성을 점령할 정도로 엄청남. 이괄의 부하 수천명이 압록강 건너 후금으로 튐. 이들이 조선 정권을.. 누르아치는 이걸 명분으로 전쟁. 모문영이 철산 앞바다에 있는 가도에 후금에 뺏긴 랴우둥을 빼앗겠다고 군사력 주둔... 

 

 

 

후금은 차하르부를 복속시키고 만주 전역을 지배. 나라 이름도 만주족 정권. ()국을 형성

홍태이지가 조선에 사신을 보내 군신 관계를 요구.이걸 받아들이는 순간 명과의 관계는 끝. 그래서 척화주전론, 주화론 머리를 숙여도 종묘사직 중요성 강조. 척화주전론 강세, 감금하고 ... 인조는 산에 올라가 농성함. 물과 식량 바닥나고 비빈들과 왕자들이 어이없이 함락되고 청군의 포로가 됨. 인조는 송파 삼전나루에서 항복. 이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청과 군신관계를 맺음

 

광해군의 아들은 아니지만 조선의 16대 군주는 인조. 인조는 아들이 네 명. 첫 번째 아들이 소현세자, 둘째 봉림대군, 셋째 듣보잡, 넷째 듣보잡.

삼전도의 굴욕에서 인조의 두 아들 모두를 볼모로 데려감. 두 아들은 중국지배 확립 뒤에 돌려줌. 소현세자는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함, 아버지가 던진 벼루 맞고 죽었다는 썰.....

 

소현세자는 청에서 볼모 생활을 하면서 청나라 실력자 섭정도루군과 친해서 소현세자를 왕으로 삼으려 했다고 인조가 계속 의심하는 상황. 결국 인조에 의해서 석연치 않은 죽음 맞이함.l 소현세자는 어린 아들이 셋이 있음. 큰 아들 이석견을 왕세손으로 삼아야 했으나 세 명의 아들 및 아내들은 죽는데... 그리고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아서 대통을 잇게됨.

 

이 사람이 조선 17대 군주 효종. 효종은 복수설치(청에 대한 보복을 다짐) 효종은 비밀리에 군사 증강(어영청), 효종 때 청나라 정말 목표 비밀리에 준비하는데 북벌 운동.

 

 

 

1차 북벌 운동은 효종때

2차 북벌 운동은 숙종때

 

청나라를 왜 정벌하자는 건지?

대명의리론, 복수설치론, 병자호란때 당한 치욕을 갚고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

-북벌론의 사상적 베이스는

명이 망하고 조선이 전통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함.

대명의리론(대보단, 만동묘) 대보단 명나라 마지막 황제 섬기는 묘,

 

 

18세기 이후에는 북학론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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