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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인문학)/모든것의 역사

한국사 조선의 건국과정

by roo9 2021. 8. 30.

전기 조선과 후기 조선을 가르는 것은 중간에 두 차례 큰 전쟁이 있었기 때문. 40년 정도 간격두고 북쪽 후금인 청의 공격으로 큰 전란을 겪음, 정묘 전쟁과 병자 전쟁. 전쟁 후 정치.경제. 사회적 변화가 옴. 그래서 전쟁 전을 전기 조선, 전쟁 후를 후기 조선.

강화도 계약 이전 조선 전기 근세. 조선후기는 근대 태동기라고 함.

 

초기는 15세기. 태종태세문단세예성까지.

보통 임금의 묘호에 성까지 들어가면 그때까지 초기.

 연산에서 선조연간까지를 조선 중기. 16세기

이 시대를 이끌어가던 사람들은 양반사대부. 그중 15세기는 집현전 학자 출신들, 신숙주, 정인지 등 관학파. 관학파 사대부들의 주도로 세조 연간의 찬란한 근세 문화를 이룩했다는 평가.

 

16세기 관학파는 기득권세력인 훈구파로 변질되었고 지방 사림이 중앙정계로 본격적 진출. 사림의 등장, 사림의 정계 진출이 활발하던 시대.

 

조선의 건국 과정

 

 

1388년 명이 고려 조정에 (우왕 정권 실세 최영) 철령 이북의 땅을 직할령으로 삼겠다고 일반적으로 통보. 그래서 최영 주도로 랴우둥(요동)공격 하기로 하고 43천 요동정벌군이 출병함. 최영은 우왕과 함께 평양성에 남고 이성계와 조민수만 떠남.

 

 

그러나 압록강 하구 위화도에서 역사적인 회군을 하면서 이성계 일파는 최영을 축출하고 우왕도 왕위에서 내쫓고 그의 아들 창왕 올렸다가 폐위하고 먼 왕손이던 공양왕 옹립(3년 몇 개월)하다 부패 혐의로 조민수 제거하고 1391년에 전국적인 양전사업 실시하고 과전법 개혁 추진. 그리고 마지막 걸림돌인 정몽주를 제거. 13927월에 도평의사사에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이성계가 왕이 되고 명의 책봉을 받아 조선이라는 국호를 책봉, 1394년에 한양으로 천도하게 됨.

 

 

 

 태조 이성계때는 소수의 재상들이 활약했다. 정도전과 조준. 이중에서도 핵심 인물은 정도전. 삼봉 정도전 경북 봉화 출신.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봉화 출신 향리 출신.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치 않았음.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설계자란 평가를 받고 있음.

 

 

 정도전의 정치 사상-그는 왕권 강화론자가 아닌 재상정치론자. 태조 왕건처럼 덕망있는 군주도 있지만 우왕 창왕처럼 또라이 군주도 있더라고. 그래서 덕이 있는 군주가 나타나면 백성이 해피하고 그렇지 않으면 고통 받는 것이 불합리하니까 임금의 덕과 상관없이 현명한 신하들이 군주를 보필하는 시스템이 중하지 않느냐며 재상을 중시.

재상은 위로는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는 문무백관을 통솔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역할 강조. 이게 정도전 정치 철학. 정도전은 십문천답. 신기리편, 불씨잡변 등 불교 날카롭게 비판. 조선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 옹호. 정도전은 우리 역사에 기록된 마지막으로 요동정벌을 꿈 꿨던 사람. 정도전의 저서 고려국사, 조선경국전(특별히 중요, 정도전의 사찬법전, 이게 경국대전 편찬에 많은 영향 미침), 경제문감(조준의 경제육정, 정몽주의 경제문감과 헷갈릴 수 있다)

 

삼군도총제부(고려말, 1391년 이성계 일파가 정치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가운데 병권을 확실히 잡기 위해 만듦. 나중에 삼군부의 모태)-의흥삼군부(태조, 태종 이방원이 사병 혁파하고 조선초에 군 통수권을 갖고 있던 것)-5위도총부(세조)

 

 

태조 이성계는 부인이 두 명, 한씨 부인은 향처(고향 함흥에서 개경으로 출사하기 전 이성계나이 십대 중반에 연상의 여자와 결혼. 아들이 여섯명. 첫째 이방우, 이방과, 이방의, 이방간, 이방원, 이방연) 두 번째 부인은 경처(이성계와 그의 아버지 이자춘이 쌍성총관부 탈환할 때 내흥을 해서 그 공로로 벼슬을 받으면서 개경에 출사하면서 장가를 다시 듦. 이게 경처, 강씨 부인은 첩의 개념은 아니고 제2부인 개념. 여기서 나온게 7번째 아들 방번, 방석, 그들의 누나뻘 경순공주) 큰아들 이방우는 고려의 벼슬을 지냈음. 나중에 고려의 신하로 남겠다고 해서 아버지와 노선이 달랐음. 그는 고려의 신하로 남겠다고 해서 결별하고 죽을 때까지 얼굴을 본 적이 없음. 농경사회는 장자의 지위만 특별했음.

 

 

 

한씨 부인은 조선 개창 전에 죽었고 강씨 부인은 조선의 왕비가 되었으니 베갯잎 송사를 한 것일테고 정도전 일파가 서포트 해서 강씨 부인 아들 이방석이 세자 책봉 받게 됨. 정도전이 이방석을 민 이유는 정도전의 정치 철학과 관련, 재상의 역할을 중시하는데 개국에 공이 많은 사람보다는 나이도 어리고 성격도 우유부단한게 재상 중심 정치 구현하는 게 맞다고 본 거지. 이성계도 막내 방석을 특별히 아꼈고. 그러니 다른 아들들은 용납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던 거지.

 

 

이후 1897년에 제 1차 왕자의 난이 생김. 당시는 왕자들도 가병들을 다 보유하고 있을 때였다. 왕자들이 조선군의 요직에 이미 배치되어 있을 때. 둘째 아들 이방과, 넷째 이방간, 그리고 다섯째 이방원 세 왕자가 측근들 동원해 기습적으로 정도전과 심요생을 죽임. 이복동생 방간 방석을 때려 죽임. 이게 무인정사.

 

 

당대 최고 영웅 이성계가 자식들에게 밀린 꼴, 생떼같은 어린 아들 둘이 죽자 그의 통치권력은 무력화 되고 아들들을 따르고 있고. 이성계는 옥쇄를 들고 나르샤 그가 평생토록 아꼈던 양주 회암사로 감. 조정에서 쫓아오니 금강산으로 감. 그뒤 고향 함흥으로 감(함흥차사의 어원) 임금이 옥쇄 튀고 나른 상황.

 

이 세왕자의 타협의 산물, 둘째 이방과가 정종으로 즉위를 함. 즉위하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감. 개경에 있는 동안 이방간와 이방원 사이 주도권 다툼이 있었고 이게 2차 왕자의 난. 정종의 양위를 받는 식으로 이방원이 즉위를 함. 이게 태종 이방원. 태종이란 묘호는 보통 굉장히 강력한 군주한테 붙이는 묘호. 그의 대표적 업적은 왕권 강화.

우선 외척 제거, 그의 부인이 원경왕후 민씨 부인임. 처남 민무구와 민무지를 때려 죽임. 나중에 남아있는 셋째 처남, 넷째 처남도 죽여버림. 외척 제거는 왕권 강화의 걸림돌이었기에.

 

 

 

엄밀히 말하면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칭한건 이방원이 건의했지만 그건 정종 때임. 아직 임금 전.사병을 혁파한 것도 이방원 주도지만 임금으로는 정종 때임. 태종은 즉위 직후 이름뿐인 문하부를 폐지하고 의정부의 기능을 대폭 강화. 문하부 낭사를 독립시켜 사간원으로 개칭하고 대신들 견제. 태종 후기에는,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 뿐 아니라 의정부를 사실상 원로 기구로 만들고 6조 직계제.

6조 직계제, 6조에 무슨 일이 있으면 의정부에 보고를 하고 의정부에서 심의를 해서 임금에게 계를 올려 제가를 받으면 의정부에서 심의하고 6조로 내려보냄. 이게 의정부 서사제. 의정부는 왕권과 신권의 조화.

그런데 6조는 6조의 판서들이 임금에게 직접 계를 올려도 좋다, 의정부를 빈껍데기 기구로 만듦. 딱봐도 이건 왕권 강화.

 

                      <태종 이방원과 민씨가 있는 헌인릉>

태종은 전국적인 양전사업(토지 측량)을 통해서 그걸로 새로이 파악된 토지 결수를 등록하는 것을 양안, 120만개의 전지를 양안에 등록시킬 정도로 전국적인 양전사업을 벌인것도 태종의 중요 업적. 태종 이방원은 억불정책, 태조 이성계가 한 억불정책은 도첩제이며 이방원은 사원토지 몰수, 승려수 과감히 줄임. 여러 군주들이 노비 변정사업을 함. 사원에 있는 승려나 노비를 가급적이면 양인으로 환원. 양인들은 세금내고 군대가니까. 사원에 있는 노비들은 그런게 없었으니까...

호패법 실시-16세 이상의 남자는 심지어 노비들도 호패를 차야 함. 여자는 없고, 남자는 차야함. 이걸로 군역이나 요역을 관리하는 목적. 호패법 제도 만든 건 이방원.

 

 

신문고 제도 실시, 8도제를 확립, 강화하면서 조선 왕조의 초석을 닦음. 태종 이방원에게는 아들 넷, 첫째 양녕대군, 둘째 효령대군, 셋째 충녕대군, 넷째 아들은 몸이 약해 일찍 죽었음. 양녕대군은 거의 20년 가까이 세자에 있었으나 덕이 부족하다고 세자에 쫓겨나고 셋째 충녕대군이 됨. 그가 바로 세종. 세종이 스무살에 왕이 되었는데 처음 6년 정도 아버지가 상왕으로 외교와 군사를 관장하고 있었음.

 

 

세종 즉위 초에 궁중 안에 학문 연구소 집현전 세움. 의정부 서사제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함. 세종은 유교식으로 오례를 거행함(국가의 중요한 행사 오례).

                                      

 

 

사대부 사이에 주자가례를 장려. 해동의 요순이라고 불림. 연등구등법, 한글창제, 각종 편찬사업, 세종의 정식 부인은 청송 심씨 이 사이에 9명의 왕자가 있었음.

 

 

이 중에 장자 조선의 오대 군주인 문종, 둘째 아들이 수양대군, 나중에 세조, 셋째 아들은 안평 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등이 있음.

이중에서 특별히 뛰어난 평가를 받았던 수양대군이나 안평대군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음.

 세종이 돌아가시고 나서 문종이 왕위에 올랐음. 재위기간이 1년을 넘기지 못했음. 나중에 12살자리 노상군에게 보위를 물려주면서 불안해 함. 동생들이 신경쓰임.

 

 

그래서 김종서와 황보인을 불러다가 고명대신으로 삼음(임금의 유언을 받는 신하) 조선의 6대 군주로 단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어린 단종을 보필해서 군국대사를 장악한 것은 좌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 특히 이중에서 병권을 장악한 우의정 김종서가 군국대사를 장악함. 우의정 김종서라 하더라도 임금의 숙부들을 견제. 이중에서도 수양대군 일파와 안평대군을 견제.

 

태조 이성계 때는 왕자들이 전부 가병들을 데리고 있어 영향력을 행사할 때 그러나 지금은 사병이 혁파 된 뒤라도 측근을 두 세명 이상 거느리기 어려웠음. 사병 거느리면 국법을 어긴 것. 그런데도 수양대군 일파는 김종서를 철퇴로 때려 죽임 이게 계유정난.

 

 

 

이것으로 수양대군 일파가 정치권력을 장악함. 그가 곧바로 왕이 된 건 아니고 영의정에 한 2년 정도 있다 어린 단종을 모시며 조정을 이끌어나감. 신하들이 매일같이 상소를 올려 수양대군은 못이기는척 왕이 됨. 단종은 상왕이 됨. 나중에 조정에 공론을 일으켜 상왕을 폐위하고 영월로 유배를 보냄. 청령포에서 단종을 비참하게 죽임.

 

 

7대 세조라는 군주(1455~1468)는 다시 왕권 강화, 병약한 문종, 어린 단종 기간 동안 약해진 왕권을 다시 강화, 6조 직계제 운영하고 종친을 등용.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기 친조카, 자기 동생 임영대군 아들 이준을 영의정으로 삼음 당시 나이 28. 태종의 딸 정승공주의 손자 남이 장군을 데려다 병조판서로 삼음. 그래서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실 종친들을 조선의 요직에 포진시킴. 원래 이러면 안됨. 종친은 벼슬을 하면 안 되었음.

집현전과 유향소를 혁파했다. 집현전 혁파한 이유는 단종 복위 운동 때문. 뽀록이 나서 비참한 죽음 당함.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출신자들.

 

유향소 혁파한 이유는 세조가 왕이 되고 나서 함경도에서 변란이 두 번 일어남. 이 난을 진압하는데 함경도 지방의 유향소 풍간이 문제였던 거야. 이 난을 계기로 유향소 혁파. 나중에 성종때 복립됨. 세조는 군사제도를 크게 정비. 조선의 군사제도의 근간인 보법 정리. 지방제도를 진관체제로 편제.

 

세조 수양대군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다. 나쁜짓을 많이 해서 인지 아들 둘이 젊은 나이에 단명한다. 도원군 의경세자가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아들 둘을 남기고 죽음.

그래서 둘째 아들이 왕위를 물려 받음 예종, 불과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조의 장례를 치르는 중간에 죽음.

 

왕위 계승 1순위는 현왕의 장자, 엄마가 정부인. 이러면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왕이 되어야 하는데 아들 나이 2. 옛날에는 7세 전에 죽는 애들이 많았음. 두 살을 왕으로 삼기에는 불안하니까 의경세자 큰 아들이 월산대군, 둘째 아들이 자을산 대군, 왕위를 이어받은 건 13살의 자을산 대군. 이유는 마누라 잘 두었기 때문에, 그의 마누라가 당대 최고 권력자 계유정란의 핵심인물 한명회의 딸이었음. 세조의 와이프였던 한씨 부인도 한명회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 그래서 한명회의 딸이 와이프로 있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 자을산 대군이 성종이 됨.

 

성종은 문물제도 정비 완성, 집혀전을 계승하는 홍문관 설치, 경연은 왕과 신하가 국정 전반을 토론하고 논의하는 제도, 이걸 매일 강화하고 활성화.

서연은 세자가 신하들에게 배우는 것을 서연

경국대전 완성, 경국대전 명한 건 세종, 이걸 완성해서 반포한 건 성종.

 

 

세종께서는 사형수에 대한 복심제를 도입하는 한편 관비의 출산휴가를 늘려주고 화척과 재인을 신백정으로 삼았다.

화척, 진척, 재인은(열외족, 천민도 아니고 정상적인 양인도 아닌 특수한 열외 집단, 호적에 올리기도 어렵고 역을 부과하기도 어려움) 귀화한 여진인이나 거란인. 조선초에 일반 양인들을 백정이라 불렀다. 이들이 우리도 백정이라 불릴 수 있게 해달라고 건의해서 화척, 진척, 재인도 백정이라 불러라, 라고 함. 그러다 보니 기존의 백정이라 불리던 일반 양인 농민들은 도살업자 천대 받는 애들이랑 같은 이름 쓰니까 쪽팔리다. 우린 백성으로 할꺼다. 그래서 조선의 백정은 도살업자로 굳어진 것. 고려의 백정은 양인, 농민/ 조선의 백정은 도살업자, 그래서 헷갈리니까 신백정이라 함. 조선의 백정은 노비나 천민보다 더 천대받는 신분.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계유 정난를 일으킨 주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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