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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 story/뷰티 앤 패션 노하우

마릴린 먼로를 자극했던 60년대 핀업 걸 제인 맨스필드 스토리

by roo9 2021. 5. 20.

1950년대 헐리우드에서 마릴린 먼로의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른 제인 맨스필드. 화려한 이미지와 파격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대중문화를 장악했지만, 그녀의 인생은 34세에 비극적인 사고로 끝났다. 이 포스팅에서는 그녀의 성장기부터 배우로서의 성공, 사생활, 죽음과 유산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를 되돌아본다.

1. 어린 시절과 조기 결혼

제인 맨스필드(본명 베라 제인 팔머)는 1933년 4월 19일 펜실베니아 브린 모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갑작스럽게 잃은 그녀는 홀로 된 어머니와 함께 텍사스로 이주하며 성장했다. 엄격한 교육 속에서도 맨스필드는 음악, 연기, 외국어 등 다양한 재능을 보였고, 16세에 폴 맨스필드와 결혼하여 1950년 첫 딸을 출산했다.

 

제인 맨스필드 가족 사진

 

2. 헐리우드 진출과 '핑크 전략'

1954년 LA로 이주한 맨스필드는 무명의 연기자였다. 여러 오디션에서 거절당한 그녀는 핑크색을 시그니처로 활용하는 전략적 이미지를 구축한다. 핑크 옷, 핑크 자동차, 심지어 ‘핑크 팰리스’라는 저택까지—모든 것이 화제였다. 1955년 ‘수영장 낙하’ 퍼포먼스로 대중의 주목을 끌며 워너 브라더스와 계약하게 된다.

3. 섹스 심벌에서 헐리우드 스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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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영화 『핑크타이츠가 뭐길래』와 『록 헌터의 이혼』으로 그녀는 섹스 심벌로 확고히 자리 잡는다. 이 시기의 제인 맨스필드는 단지 외모만으로 성공한 배우가 아닌, 대중 이미지 구축에 능한 마케팅 천재였다.

4. 사랑, 결혼, 그리고 복잡한 가정사

맨스필드는 세 번의 결혼과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미스터 유니버스 미키 하기타이와의 결혼에서 태어난 마리스카 하기타이는 훗날 배우로 성공한다. 그러나 복잡한 연애와 이혼, 재혼, 동시다발적인 연애 관계는 그녀의 사생활에 끊임없는 화제를 불러왔다.

 

마리스카와 제인

 

5. 경력의 고조와 하강

1950년대 후반, 영화, 텔레비전, 나이트클럽까지 맨스필드는 전방위로 활동했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인기가 하락했다. 미국 대중문화의 분위기 변화와 함께, 그녀의 고정된 이미지가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재기 시도로 찍은 1963년 영화 『Promises! Promises!』는 미국 메이저 영화 최초의 나체 출연으로 논란과 주목을 동시에 받았지만, 경력 회복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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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무대 위의 여배우로서 재도전

이후 맨스필드는 라스베이거스를 비롯한 다양한 무대에서 공연하며 대중과 가까이에서 소통했고, 보다 진지한 배우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섹시함을 넘은 실력을 보여주려 한 그녀의 노력은 조명받기 시작했다.

7. 갑작스러운 죽음과 안전장치 '맨스필드 바'

1967년 6월 29일, 나이트클럽 공연 후 이동 중 트럭과의 충돌 사고로 제인 맨스필드는 사망했다. 세 자녀는 기적적으로 생존했지만, 그녀는 단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미국 교통안전청은 트럭 하단에 충돌 방지용 막대 설치를 의무화했고, 이는 지금도 '맨스필드 바(Mansfield Bar)'로 불린다.

8. 재평가되는 여성 아이콘

최근 들어 맨스필드는 단순한 섹스 심벌이 아닌, IQ 163, 5개국어 가능, 마케팅 전략에 능한 천재적 인물로 재조명되고 있다. 그녀는 당대의 제약 속에서도 스스로를 홍보하고 통제할 수 있었던 진취적인 여성 연예인이었다.

9. 마리스카의 성공과 유산의 계승

맨스필드의 딸, 마리스카 하기타이는 『Law & Order: SVU』에서 올리비아 벤슨 역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수차례 에미상을 수상하며 어머니의 유산을 다른 방식으로 계승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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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화려함과 비극이 교차한 이름

제인 맨스필드는 당대의 문화 코드였고, 그녀가 만든 핑크색 세상은 지금까지도 ‘전략적 셀프브랜딩’의 사례로 회자된다. 비극적인 최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성 연예인의 이미지 생산과 대중 소통의 방식을 선도한 인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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