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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인문학)

발해의 역사에 관하여

by roo9 2021. 8. 13.

668 고구려가 멸망 고구려 사람들은 신라로 편입되거나 상당수는 열도로 건너갔다. 물론 그대로 남기도 하였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당나라에 끌려가서 이주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당시 번장 관직은 이민족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유명해진 군장이 번장이다. 고구려 출신 당나라에서 번장으로 이름을 드높인 사람이 고선지 장군이다. 당시에는 고구려 출신들이 많은 활약을 했다. 당시 고구려 유민 가장 많이 집단적으로 이주해서 살고 있던 곳이 베이징에서 북동쪽으로 80키로 가다보면 조양이 나오는데 당시 영주라 불린 곳이다. 그곳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다. 영주는 거란족 관할 권이었기 때문이다.

 

발해의 성립 배경인 고구려 유민과 거란족

 

 

 

고구려 멸망 거란족이 독립시켜 준다고 해서 거란족이 고구려 정벌 과정에서 상당수 전사로 참전했다. 막상 고구려 멸망하고 나니 당나라에서 약속 지키지 않았다그러자 거란 영웅 이진충이 난을 일으켰다. 그뒤 영주 지방이 거란 지배하게 된다. 여기서 고구려 유민말갈 유민들이 십수만 이상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당의 지배가 약화된 틈을 타서 약 20만명이 대탈출을 하였다.

 

탈출한 이들은 동북쪽으로 갔다. 고구려와 말갈은 일시적으로 힘을 합쳤다. 이때 고구려 유민 족장 대중상이었고 말갈 족장은 걸사비유였다그러자 당나라는 생산성 확보 차원에서 노동력 비중이 큰 땅보다 사람 잡는데 혈안이 된다. 당나라는 이해고 장군을 보내 추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아주 유명한 장군이 나온다.

 

발해 군왕 대조영의 탄생

 

 

 

 

천문령고개에서 698 여름에 이해고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추격군과 고구려 유민들이 대격전이 벌어졌다고구려와 말갈 유민들이 대승을 거두었다여기서 대중상 사망한다. 그리고 걸사비유도 사망했다둘이 죽자 대중상 아들 대조영이 새로운 리더가 된다. 그는 698 겨울 동모산에서 진이란 나라를 세우게 된다. 십수년 지나서 당이 나라로 인정하기 시작하고 713년에 당나라에서 대조영을 발해 군왕이라 책봉하였다. 정리하면 발해라는 나라의 성격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 유민들의 연합 정권이다.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발해 문화

 

 

 

발해 상경성 발굴을 했더니 온돌 장치가 무더기로 발굴 되었다. 중원 지역은 이런 문화가 아예 없어서 놀라움이 컸다. 온돌 문화는 예맥족 계통이 쓰는데 고구려 문화를 발해가 계승한 걸로 보인다. 3 문왕의 둘째 정혜공주 묘에 돌사자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구려 문화였다와당이란 기와문양이 있는 기와마다 나라 양식이 있는데 발해의 기와도 고구려 계통이다

 

발해 지배층의 무덤은 상당히 많은 수가 굴식돌방 무덤이다. 천장 구조가 모줄임 구조인데 원래 오늘날 터키에서 전파되었는데 고구려가 모줄임 구조이다발해 문화의 상당 부분이 고구려 문화를 계승했다는 점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발해의 지배층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고구려 계승에 있다.

 

 

2 무왕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는데 국서에 발해는 고구려의 고터를 수복하고자 했고 부여의 풍속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고려 이승휴가 역사서 제왕운기는 발해를 우리 역사로 처음으로 기록한 역사서이다조선 후기 역사가 유득공이 발해를 북국 통일신라를 남국이라고 하며 남북국 시대로 표현하였다. 이종의 동사나 한치훈의 해동역사 같은 책에도 발해를 우리 역사로 기록해 놓았다.

 

발해의 정치발전 과정

 

발해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더. 15명의 왕이 있었다고 하는데 서너명은 이름도 모른다발해의 군주 핵심은 무왕문왕선왕 뿐이다 번째 고왕 대조영(698)은 동모산에서 국호를 진이라 했지만 당으로부터 발해 군왕 책봉 받았다.

 

2 대조영의 장자 대무예 무왕의 동생은 대문예이다무왕은 719~737, 연호에 무가 붙었으니 군사적 업적을 의미한다무왕은 북만주 일대 장악하고 727년에 일본과 국교 수립을 맺었다. 장문휴 장군 보내 산둥지방 공격 732연호를 인안이라 하였다.

 

2 무왕 발해 수도는 동모산이었다. 발해가 성장하니 당나라 조종에서 의식을 하기 시작했다.  원정군을 파견하기 어려우니 흑수말갈을 끌어들여 외교 공작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대문예 사건이다. 2 무왕의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망명간다. 당은 대문예를 보호하고 있으면서 후일을 기약하며 나름 딜을 하고 있었다. 송환을 요구했지만 당이 거부한다. 그래서 2 무왕 장문효를 보내 흑수말갈을 제압하는 산둥반도 덩저우 까지 공격 등주자사 죽이고 온 해가 732년이다당나라는 상당히 당황하였고 당의 요청으로 신라가 발해쪽 공격했지만 실패한다당과 신라는 연계를 강화하자 발해는 국제적으로 고립된다. 그래서 돌궐제국과 일본과 연계를 강화한다그런데 3 문왕 즉위 이후 당과 친선 관계 확립한다.

 

 

발해 군주  3 문왕 대무예의 장자 흠무. 3 문왕 때는 문치로 돌아서면서 당의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신라와도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연호는 대흥이었지만 보력이란 연호가 따로 있었다. 무왕과 문왕의 연호는 구별해야 한다.

 

발해의 5경

 

 

발해의 천도구국( 동모산 3 초기까지있다가 742 문왕때 중경으로 천도한다. 10 밖에 안 살았다. 755년에 상경으로 천도하고 목단강 평야에 계획도시 건설했는데 목적은 왕권강화 및 체제정비에 있었다. 문왕 죽기 전에 동경으로 천도하고 문왕 죽자마자 상경으로 다시 돌아갔다. 멸망할 때까지 천도는 상경이었다. 3 문왕때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했다 정도만 알고 있으면 된다.

 

선왕의 해동성국

 

 

 

문왕 사후 왕의 이름도 없는 계보가 등장한다. 그러다 9 군주 대조영 가계가 끊어진다.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현손(손자이상 내려가는데 정확하게 모를 )이던 대인수가 선왕. 발해의 10 군주 선왕이 중요한 군주이다. 그는 요동에 진출하고 지방제도 완비하고  해동성국이라 칭하고 연호를 전흥이라 하였다. 10위는 발해의 군사 조직. 10정은 신라의 군사 조직을 의미한다.

 

 

9세기 선왕 발해가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다요동지방에 진출했는데 당시 당나라는 이빨빠진 호랑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신라도 하대라 옛날같지 않았다. 오로지 발해만 광대한 제국이었다. 중국사람들이 바다 동쪽의 성대한 나라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9세기 선왕 다음 발해 군주는 이름도 없었다발해는 926거란족은 계속 요하강 일대 부족단위로 유지하고 있었다. 10세기 전반 거란 8부족을 통합하는 영웅 야유라보기가 거란족 통합해서 요나라를 세웠다요는 제일 먼저 발해를 공격하였다. 거란의 발해 공격이 시작된지 불과 달이 되지 않아서 멸망한다.(230 정권)

 

백두산 화산 폭발이 발해 멸망설로 유력

 

발해 멸망 학설 백두산 화산 폭발설 유력하게 보는 편이다. 당시 상당히 대규모 화산 폭발이었던 것 같다흉년 기근 발생 거란족이 침공하니 허약하게 무너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발해정안국 세워졌지만 발해 유민들은 고려로 사람들이 많았다.

 

발해와 신라인들의 문화적 경쟁의식

 

대표적 사건이 빈궁과 등제 서열 사건이다빈궁과는 당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과거시험 9세기빈궁과 합격자 가장 많은 합격자 배출은 신라였다. 100여년 동안  60 다음으로는 발해인이 10 정도 배출되었다. 875 신라인 이동이란 사람과 발해의 오소도란 사람이 빈궁과 수석을 서로 다투었다이때 오소도가 수석의 영광을 차지했다그러니까 최치원이 일국의 수치로 남을 것이라고 평한 기록이 있다이후 이십여년 신라의 천재학생 최언위발해인으로는 오소도 아들 오광찬이 수석의 영광을 다투었는데 최언위가 차지했다. 그러자 오소도가 우리 아들이 최언위보다 낮은 성적을 받은 것을 용납할 없다며 당에게 성적 고쳐 달라고 요청하자 거절 당했다. 이는 발해와 신라의 경쟁을 엿볼수 있는 부분이다. 그밖에 쟁장사건은 발해사신과 신라사신이 서로 상석에 앉겠다고다툼을벌인사건이다. 신라 사신이 보통 상석에 앉았었는데 신라 하대 즈음이고 발해는 컸다고 상석에 앉겠다고 벌인 일이다.

 

발해의 관제

 

발해의 중앙 관제는 3 문왕 당나라의 3 6 관제를 수용했다. 이를 발해 실정에 맞게 변용해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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