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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인문학)/모든것의 역사

고려 12세기 초 원간섭기 이야기

by roo9 2021. 8. 24.

 

여진은 유력한 부족으로 흩어져 있음. 여진은 기마민족고려 국경 약탈을 일삼았다. 반면고려는 보병부대윤관 장군이 숙종 때 별무반 17만명을 조직한다. 별무반은 신보군(새롭게 편성한다)과 신기군(새롭게 편성한다 기병), 항마군(승려군외 떨거지)이들을 통칭해서 별무반이라 하였다. 숙종 1107 윤관 장군이 별무반 조직해서 오늘날 함경도 일대에서 여진 정벌함

 

여진족 통합 후 금나라 세움

 

윤관이 9성을 쌓은 것은 예종 척준경이 부하 10여명과 적장 사살등 엄청난 성과를 일으킨다.  그리고 동북 9성을 쌓았다. 그러나 관리를 제대로  못해 1년 만에 돌려준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나지 않아 여진족이 통합된다. 아골타 영웅이 등장하고 금나라를 세운다. 1115 금나라.(완안부 여진)

 

 거란이 세운 나라 요

 

송이 거란에게 핍박을 받은 터라 송이 금에게 동맹 제안한다 바로 해상 맹략이 맺어진다. 이는 바다를 통한 동맹이란 의미. 그래서 금송 연합군이 거란을 공격해서 거란 멸망시킨다.

 

금은 숲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송은 금을 야만인 취급했다. 그래서 나중에 금과의 약속을 깼다. 그러자 금은 깊은 빡침을 느끼고  길로 송나라 수도 카이펑 공격하여 함락당하고 송이 멸망한다. 그때가 1127거란은 초원족. 그래서 송의 세력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먹은 남송이다.

 

묘청의 난 배경

 

 

 

1126 이자겸이 쫓겨나기 바로 금나라가 고려에 군신관계를 요구한다. 당시 이자겸 일파는 굴복하였고 이것이 묘청의 배경이된다.

고려의 대외 정책의 기조는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내세워 북진 정책. 과정에서 거란을 배척한다.

 

강동의역 혹은 강동성 전투

 

13세기 중엽 몽골 초원 통일 테무진이 징기즈칸으로 추대된다. 몽골에 쫓긴 거란 잔당이 고려에 숨어 살자 동진국몽골,고려가 토벌된다. 이걸 강동의 사건으로 불린다.

 

 

고려가 몽골과 처음으로 접촉한 계기이며  사신 보내 무리한 조공 원한다.  그리고 몽골 사신 저고여가 돌아가다 압록강변에서 피살된다.  사건을 문제 삼아 1231 살리타가 고려를 침공한다.

 

팔만대장경 제조 배경

 

근데 귀주성에서 박서가 몽골의 대병을 달이상을 맞서 싸웠다. 그러자 몽골병이 우회해서 개경을 침공한다. 그러자 최우가 몽골에 사과하고 화친을 맺는다. 당시 최우 정권은 이듬해 강화도 천도를 단행한다. 천도를 계기로 몽골과 30 동안 항전한다. 강화도 천도 이유는 몽골이 수군전에 약하기 때문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 버렸다. 이에 경주 황룡사 9 석탑이 불타고.몽골의 침입을 어처구니없게도 불력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해 15 동안 제조된 바로 팔만대장경이다. 몽골과의 항쟁 과정에서 피지배층이 앞장선다. 2 침입 당시 용인 처인부곡에서 몽골 항쟁충주성에서의 항쟁. 1차는 지배층 몽골군 나타나자 도망간다. 그래서 노군과 잡류만 남아서 버틴다. 6 다인철소 항전.

 

몽골과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최씨 정권 무너지고 고려왕이 주도해서 몽골과 화친 하고 왕권 회복. 삼별초 대원 통솔해서 진도로 배중손이 4 동안 항쟁하고 대원들은 제주도에 집단 자살한다.

 

간섭기 왕들

 

원종은 태자였던 충렬왕을 보내 몽골에 항복한다. 원의 쿠빌라이 데칸의 딸인 제국대장 공주 사위가 충렬왕이 군주가 된다. 충자 붙은 임금 80 동안이 간섭기를 의미. 고려는 자주국이 아닌 제국의 부마국제후국이 . 원간섭기 후기.

 

 원의 강요로 차례 일본 원정을 떠나지만 실패. 정동행성동쪽을 정벌하기 위한 행성. 나중에 내정간섭 기구로 변질됨.이중에서 정동행성 이문소의 폐해가 심했다 간섭기에 영토 축소. 쌍성총관부, 오늘날 평양 일대는 동녕부, 제주도는 탐라 총라부 개는 충렬왕 돌려받음.

 

 

간섭기에 관제 격하.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통합되어서 첨의부가 되고 6부가 통합되어 4사가 . 만호부는 고려 군사 기구에 간섭을 행하는 . 다루가치는 감시관. 순마소는 반원인사 색출하는 사법기구. 인적물적 수탈하기 위한 결혼도감-공녀. 이것 때문에 결혼 도감 나오고 조혼 풍습 생긴것.

 

매잡는 기구 응방

 

 

응방()- 잡는 기구보라매 해동청을 잡기 위해 설치된 관청이 응방. 간섭기에 응방의 폐해가 심했다. 고려 왕실이나 귀족들 사이에서 변발과 호복이 몽골풍이 유행한다.

 

원간섭기지배층은

 

원간섭기의 지배층은 권문세족이었다. 친원파. 부원배 집단. 도평의사사 고위 관직 독점. 산천을 경계로 삼을 만큼의 넓은 농장 보유.이들이 권문세족. 원간섭기의 정치 충렬왕과 충선왕, 충렬왕은 최초의 부마 출신 군주, 그의 아들이 충선왕. 둘은 부자 지간이지만 원나라 황실의 라인이 다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 왕위다툼이 여러 있었음.

 

충선왕이 설치한 개혁기구는 사림원. 소금 전매제 실시. 왕위에서 쫓겨난 원의 대도 베이징으로 돌아가 만권당이란 개인 연구소 설치함. 고려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세조구제(불개토풍)여기서 세조는 원의 세조 쿠빌라이 데칸을 말한다. 고려가 항복할 타이밍이 좋았고 라인을 잡음. 고려는 쿠빌라이에게 항복하였다. 쿠빌라이는 고려의 종묘와 사직을 지켜 주겠다. 고려의 국호를 유지시켜주겠다고 말한 불개토풍. 고려의 토풍을 바꾸지 않겠다. 권문세족이나 부원배들이 고려를 지방의 시도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여러 있었다.

 

 심양왕은 원나라에서 고려 왕실 통제 위해서 개경에 있는 고려 왕국 말고 심양에 있는 심양왕을 두었음. 거기 최초의 심양왕이 충선왕.

 

간섭기의 관제 변화

 

2성이 첨의부, 6부가4(전리사,판도사군부사전법사)

 충선왕은 차례왕, 1298 때는 6개월만에 퇴출, 1308~13 6 동안 재위하다 쫓겨남.

부왕(충렬왕) 왕위 갈등, 개혁 추진(사림원), 만권당(대도)-고려 학자 이제현, 학자 조맹부 고려 후기 문화에 많은 영향 .

충렬왕 홍자번이 편민 18 건의. 찰리변위도감(충숙왕), 정치도감(충목왕)-원의 간섭과 지배에 대항하여 개혁을 추진했지만 권문세족 원의 간섭으로 실패한 일련의 시도들.

 

 공민왕의 개혁 정치

 

배경-. 교체기.

공민왕 초기 개혁 반원정책-친원파(기철) 제거, 변발과 호복 폐지(동골풍 폐지), 관제 복구정동행성 이문소 폐지쌍성총관부 무력 탈환,요동 공략.

내정개혁-전민변정도감 설치(신돈),정방 폐지유교 교육 강화(성균관 정비-성균관을 순수 유교 교육 기관으로 )

 

 홍건적의

 

 

흥왕사의 (김용의 )

공민왕은 왜침과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개혁이 잠시 중단되기도 . 공민왕 후기 개혁은 승려 신돈을 내세워 전민변정도감 설치.... 공민왕 경학 중심으로 과거제 개편성균관을 순수 유교 교육 기관으로 정비, 이런 조치들 때문에 나중에 신진사대부라고 하는 새로운 개혁세력이 태동하게 .

 1474 공민왕은 측근들에게 암살. 이후 이인임 일파가 공민왕의 아들 우왕을 추대. 우왕 15 동안 이인임 일파가 권력을 농단. 우왕 때는 친원적 성격이 강함. 구귀족 세력의 발호가 심했음. 우왕 마지막 최용과 이성계가 왕권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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